Pastor's desk

2018년 6월 17일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 하고‘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르코 5: 37)

이제는 완연한 여름이 온 듯하지만 찌는 듯한 열기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여름은 여름이지만 여름은 아직 아닌 듯한 여름입니다. 말장난같이 이런 어정쩡한 상황은 우리 일상에 참 자주 일어납니다. 대부분이 흑백이 명확한 상황을 선호하지만 결국 선택의 순간은 모호함으로 가득합니다. 그 모호함 속에 우리는 “아니오” 보다는 “예”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처럼 “예” 할 것은 “예”라고 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 답할 수 있는 결단력과 용기를 갖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대답을 해야 하는 순간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그 대답이 가져오는 상황에 더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물어본 사람의 지위나 친밀도 등이 이성적 판단에 앞서기 때문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많은 순간 “예”라고 해야 할 때 “아니요”하고, “아니요”라고 해야할 때 “예”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대한 책임 앞에서 또 갈등과 후회를 하게 됩니다.

어릴 적 읽은 삼국지의 제갈공명과 유비의 삼고초려로 통일의 대업에 참여합니다.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유비라는 사람을 믿고 그와 함께 대업에 동참하는 것이 더 큰 의미를 두고 참여합니다. 그 결정에 제갈공명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고 그 대업을 위해 투쟁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제자들에게 마지막 만찬을 나누며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십니다. 식사 후 베드로와 요한을 데리고 게세마니 동산으로 가시어 마지막을 피땀을 흘리시며 준비하십니다. 이윽고 유다가 이끄는 수석 사제와 원로의 병사들이 와서 예수님을 체포하려 할 때 베드로가 나서서 대사제의 종의 귀를 자르며 반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잘린 귀를 치유해 주시며 순순히 잡혀가십니다.

죽음에 직면한 예수님은 인간적인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십니다.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고 이를 몰라라 하며 잠에 취한 제자들에 섭섭해하시는 장면에서 잘 드러납니다. 또한 이전에 당신의 죽음을 예언하실 때 베드로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펄쩍 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뒤로 물러나거라.”라며 책망하십니다.

당신을 위하는 말을 한 베드로에게 유혹자 사탄이라 일컬은 것은 바로 당신이 유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유혹을 이겨내십니다.그리고 당신이 당시 아버지께 하신 대답, “예”에 대한 책임을 완수하십니다. 바로 파스카의 신비는 이렇게 완성되십니다.

인간적인 나약함을 이겨내신 그 의지는 바로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출발하며 그 믿음으로 완성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단지 인간적 결단력 있는 의지와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적당히 한발을 걸쳐놓은 어정쩡한 신앙이 아니라 단호한 결단력을 갖은 적극적인 신앙을 예수님은 원하십니다.

그 신앙은 인간적인 계산으로 손해 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나아가 목숨을 내어놓는 아주 위험한 결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바보 같고 어리숙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에는 참으로 고귀하고 장한 결정이며 이는 예수님의 부활과 같이 영원한 삶의 길임이 분명합니다.

요즘 여름 날씨는 여름 같지 않아 인간적으로 좋아하지만, 오히려 감기 걸리기 쉽고 곡식이 열매를 맺는 데 쉽지 않는 날씨에 풍년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결국 여름은 여름다워야 하고 겨울을 겨울 다와야 하듯이 우리 신앙인은 신앙인다워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을 통해 다시 한번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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