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4년 4월 7일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길게 느껴진 기도와 재계, 그리고 자선의 40일간의 사순시기의 열매로 지난 주일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성삼일을 지낸 지 한 주간이 지났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000년 희년의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 신심이 매우 깊었던 폴란드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 하였고, 그날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선포하여 2001년부터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며, 하느님의 자비를 기리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시작됩니다. 천지 창조, 특히 당신의 모습과 형상으로 아담과 이브의 창조하시어 당신의 입김을 불어 넣어 생명을 주시고 완벽한 에덴동산에서 살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신 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 즉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그 사랑의 말씀을 어기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죽음의 벌을 받았어도 후손을 낳게 하는 축복을 주셨고, 다른 피조물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발로입니다. 이 사랑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사람으로 보내시어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갖도록 하신 것(요한 3: 16)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파스카의 신비, 즉 수난과 죽음은 결국 부활을 위한 과정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자비의 신비입니다. 인간의 고난은 천벌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사랑에 귀의하여 구원받게 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난과 죽음을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하여 하느님께 귀의하게 합니다.

  따라서 부활절은 생명의 축제이며 하느님 사랑의 축제입니다. 그 사랑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온전히 받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믿어서 일상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이웃에게 자신을 대하듯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그는 자비를 입을 것이다.” 이웃에게 베푸는 자비는 ‘용서’에서 출발합니다. 용서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용서가 없는 곳은 평화가 없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는 삶이 없습니다. 그저 약육강식의 처절한 생존 경쟁이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하느님이 안 계십니다. 바로 지옥이 그곳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방문한 사건을 들려주는 요한복음의 말씀입니다. (요한 20: 19-3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다락방에 두 번 방문하는데, 이는 다른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갈릴레아에서 만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락방에 방문하신 것은 부활하신 주간 첫날, 즉 부활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신 첫마디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평화는 우리 구원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평화는 첫째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두려움은 다가오는 고난과 죽음을 걱정하면서 자연히 생기는 극도로 불안한 마음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신들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미래는 불확실하였고,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언제 그들을 잡아 죽일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다시 살아오셨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를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0: 22-23)

  이 장면에서 창세기의 장면이 연상됩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의 입김을 불어 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입김은 바로 하느님의 입김이며, 이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불어넣어 준 것입니다. 그 생명은 단순히 육체적 생명을 넘어 영적 생명이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생명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첫 사람인 아담을 만드신 다음 혼자는 좋지 않으니 동반자인 이브를 만들어 함께 살아가게 하십니다. 바로 가장 원초적이고 친밀한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서로를 배려하고 위해주는 것이었고, 그렇지 못할 때 또는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에 대한 이해와 용서였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유혹에 빠져 함께 선악과를 먹고 처음으로 한 것은 자기 책임을 전가한 것입니다. 아담은 이브에게, 이브는 사탄에게…그들은 자기 잘못을 용서 받기 보다 변명을 먼저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달랐습니다. 죽음까지 불사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얻는 영광이 당신의 부활이며, 당신을 믿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즉 세례를 받은 우리의 영광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원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님께서 받으신 부활의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입김으로 불어 넣어 주는 성령으로 드러납니다. 용서의 권한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약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세상 생각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유혹 앞에서 갈등하듯이…그렇게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회개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빕니다. 고난받는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회개하여 용서받은 것처럼, 또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바오로가 회개하여 예수님의 사도가 된 것처럼…우리도 회개하고 용서받아 오히려 더 굳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하며, 그 자비를 이웃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비 주일’의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깊은 신심을 가졌던 파우스티나 성녀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무지개처럼 빛나는 예수님의 성심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Jesus, I turst in You.)” 이 신심은 ‘예수 성심’ 신심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신심입니다: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오늘날처럼 세계의 정치 경제가 혼란스러울 때, 가장 필요한 것은 걱정이나 두려움 또는 이기적인 경쟁이 아니라 서로 배려하고 용서하며 하느님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는 ‘자비’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느끼고 감사드릴 때, 우리의 마음이 넉넉해지고, 나아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이는 또 더 많은 자비를 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나누면 나눌 수록 더 많은 사랑과 자비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풍성한 하느님의 자비 앞에 우리는 토마스 사도처럼 의심을 거두고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0: 28) 저는 주님께 의탁합니다.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