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4년 3월 17일

사순 제5주간을 맞이하는 오늘은 3월 17일로 전통적으로 아이리쉬(Irish)의 수호 성인 ‘성 패트릭 기념일’입니다. 이날을 맞아 뉴욕에서 퍼레이드가  어제 토요일에 미리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아이리쉬의 민족적 자긍심이 가득한 가톨릭 잔치입니다.

  패트릭 성인은 사실 아이리쉬 사람이 아닙니다. 전해 내려오는 아일랜드 전승에 의하면 성인은 5세기 로마의 식민지인 지금의 영국 브리톤에서 태어나 청소년 때 아이리쉬 해적에 납치되어 노예로 6년간 착취당하다 도망하여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갔다가 훗날 사제가 되어 다시 돌아갑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사랑을 가르치기 위하여……그렇게 아일랜드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게 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성인의 용서와 화해가 돋보입니다. 그렇게 패트릭 성인은 아이리쉬 교회와 뉴욕 대교구, 등 전통적으로 여러 켈틱 지역의 수호 성인으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사순 시기의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다음 주 ‘성지 주일’을 기점으로 성주간에 들어가며 성삼일을 준비하게 됩니다. 40일간의 기도, 재계, 단식 그리고 자선을 통한 예수님의 사랑의 희생을 통한 부활에 동참하려 노력해 왔습니다. 남은 기간 더욱 정진하여 부활 성야의 기쁨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오늘 친교실에서 있는 뉴욕 헌혈 행사에 많이 참여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부한 피가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에 헌혈이 진정한 사순의 기도와 자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피를 흘리시어 세상을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을 나누어 생명을 살리는 영광에 동참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과업을 완수하시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제자들 앞에서 당신의 때가 왔음을 알리는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때는 바로 세상이 심판을 받아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때이고, 세상의 우두머리, 즉 사탄이 예수님께 패배하여 밖으로 쫓겨날 때입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사탄을 심판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 가득한 세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광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통과 죽음을 수반합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지 알려주십니다. 바로 십자가 나무에 들어 올려져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은 세상의 영광과 사뭇 다릅니다. 오히려 세상은 저주라고 여기고 파멸이라고 여기는 비참한 죽음을 말합니다. 이 죽음은 사랑의 희생입니다.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때, 하느님의 말씀대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시는 피로 말미암아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가 구원을 받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아버지의 영광이 됩니다. 이는 나아가 아들, 예수님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의 희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희생적 믿음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요한 12: 24-26)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목숨을 미워하는 것인데, 이는 바로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사탄과 같은 나쁜 생각들, 욕망, 시기, 질투, 간음, 이기심, 두려움 등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희생이 쉽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무리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12: 27)  다가오는 죽음에 직면한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과 행동 하나하나가 쉽게 하신 말씀과 행동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고 성찰하고 인내하며 꿋꿋이 걸어간 굳은 믿음으로 두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걸어간 길입니다.

  그렇기에 피하고 싶은 순간,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해서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12: 27, 28) 이 고백이 예수님의 존재의 의미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인간적 고뇌와 두려움을 뛰어 넘어 깊은 신앙의 승리를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이 말씀에 하늘의 아버지도 답을 하십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12: 28)

  신앙의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가능하게 만들지 쉽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음은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그길이 편하고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고난을 거부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감당하게 해줍니다. 나아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그 고난을 이겨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거리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지만, 그중에도 예수님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고, 기도하며 함께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모님이 그렇고, 예수님의 피땀을 닦아 준 베로니카가 그렇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키레네 시몬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각자의 신앙의 중요하며, 각자의 신앙이 모인 교회 공동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모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거기에 당신께서 그함께 계시어 바라는 바를 이루어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이를 증명합니다. (참조 마태오 18: 20) 또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12: 26)

  신앙은 무엇이든 가능하게 해주지만, 쉽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 어려운 길을 걸으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걸어가 목적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걸어가기 위해 주님께 솔직한 죄를 고백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이번 주 화요일 (오전 10시-12시; 저녁 7시-9시)의 판공성사에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주님과 함께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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