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4년 2월 18일

지난 수요일 회개의 상징으로 재를 머리에 바르고 시작한 사순 여정을 잘하고 계시는가요?

오늘 첫째 주일을 맞아 사순의 의미를 다시 새겨봅니다.

  지난 주일은 설날 연휴로 로사리오회가 준비한 떡국 잔치 덕분에 따스하고 풍요로웠습니다. 그리고 떡국 잔치에 이은 윷놀이와 공기놀이로 흥겨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현 인류의 특징 중 하나가 ‘놀이하는 인류 (Homo Ludens)’라고 합니다. 이는 인류학자 요한 하위징거의 주장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은 놀이를 통해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놀이는 한정된 장소에서 한정된 시간 안에 일어나는 가상의 삶을 즐기지만, 단순히 가상이 아니라 현실의 삶과 강한 연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놀이는 단순히 승부의 경쟁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유대감과 철저한 규칙을 통해 공동체의 질서를 배워갑니다. 놀이는 사실 원시시대 이전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동물도 놀이합니다.

  수렵시대에는 사냥도 단순한 식량을 구하는 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놀이로 즐기며 함께 협동하고 경쟁하며 발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간의 놀이는 문명의 씨앗이 되고 문화가 되어왔고, 나아가 공동체의 정체성까지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놀이는 승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놀았던 윷놀이가 이러한 이론을 강하게 증명하는 듯합니다. 네 개의 나뭇조각을 던지며 하는 아주 간단한 놀이가 실상 일정한 규칙 아래서 수많은 변수로 고도의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고, 또한 우연이라는 변수로 전략과 전술 마저 물거품이 되는 상황을 맞기도 하며 우리의 삶을 그대로 투영하는 듯합니다.

  윷놀이가 끝날 때까지 각 팀은 하나가 되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몰입합니다. 한정된 공간과 시간에 희로애락을 온전히 경험합니다. 다만 놀이의 참맛은 그 놀이가 끝났을 때 희로애락은 현실이 아니라 기억으로 남습니다.

  윷놀이는 가장 한국적인 게임으로 우리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놀이 기구가 간단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게임이지만, 해보면 그 깊이가 깊고 복잡하고 수많은 변수와 경험 그리고 우연의 쌍곡선 위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합니다. 그를 통해 서로 유대감 공유하게 됩니다.

  ‘놀이하는 하느님( Deus Ludens)’라고 하느님을 이해하기도 합니다. 이는 잠언의 한 구절에서 나온 콘셉으로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잠언 8: 30-31)

  하느님은 엄격하고 강직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자녀들과 즐겁게 뛰어놀아 줄 수 있는 다정한 아버지임을 드러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보다는 ‘아빠’라고 부르는 데서 더 확연히 드러납니다.

  놀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놀이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 안에 갇히게 됩니다. 남을 평가하게 됩니다. 완고해지고 아집에 갇혀버립니다. . 놀이가 마치 철없는 아이의 장난쯤으로 여깁니다. 놀이를 즐기면 아직 철이 없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술의 힘을 빌려 마음을 열고 깊은 심연의 놀이에 대한 갈망을 끌어내는지도 모릅니다.

  나아가 놀이를 한심한 시간 낭비라고 여기는 이는 ‘내기’를 좋아합니다. 게임 자체를 즐기지도 동료들과 하나가 되어 자유로운 시간 자체를 즐기지 못합니다. 내기를 하지 않는 게임은 한심한 시간 낭비라고 하고, 집중하지 못해서 재미없다고 합니다. 게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만을 승부욕으로 채우려는 욕망일 수 있습니다.

  게임은 승부 이전에 함께 즐기면서 서로의 유대를 깊게 하는 시간입니다. 친밀한 공동체가 되는 과정입니다. 생존의 사냥이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놀이, 즉 게임은 생존의 심각성이 삶의 즐거움으로 승화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보시고 참 좋아하신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사순 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하는 변화의 과정이지만, 언제나 무겁고 진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즐겨야 합니다. 의무가 아니라 변화를 통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사순의 기도와 재계, 그리고 자선이 부활 때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사순은 고행의 여정이 아니라 희망의 여정입니다.

  단식의 어려움이 극대화되기보다 단식 후 먹는 음식의 깊은맛과 즐거움이 더 크고 행복한 기대와 설렘이 있어야 단식의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사순 기도와 재계 그리고 자선이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하는 일이면 고통과 어려움이 반감이 됩니다.

  격언에 “혼자서 가는 길은 빨리 갈 수 있지만 멀리 갈 수 없고, 둘 이상이 가면 늦어지지만 멀리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여정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입니다. 빨리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혼자가 아니라 같이 가야 하는 동행의 여정입니다.

  동행의 여정은 바로 놀이가 동반되는 여정입니다. 놀이는 웃음을 주고 즐거움을 주며 성취감과 유대감 그리고 존재 가치를 심어줍니다. 이 길이 바로 하느님 나라로 동행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 18: 19-20)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논쟁과 분열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놀이가 있을 때 화목하고 행복합니다. 그러면 식사 시간이 생존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삶을 즐기는 나눔의 풍요로운 놀이가 될 것입니다. 자기주장에 갇혀 서로 비난하는 논쟁이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삶의 나눔이 될 것입니다.

  가족들이 모여 할 수 있는 말이 명령체의 말밖에 없다면 얼마나 건조하고 삭막할지 생각해 봅니다. 늘 듣는 소리는 “먹고 살기가 바빠서…….”입니다. 맞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부모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나 무거운 짐을 더는 것이 단지 경제적 풍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덜고 책임의 멍에가 쉬어지기 위해서는 화목한 관계입니다. 현실적인 명령이 아니라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나누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각자가 힘든 일 즐거운 일 우스운 실수담 등. 삶의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수 있는 관계가 가족이고 교회입니다.

  사순 여정의 시작에서 발걸음이 너무 무겁지 않기를 바랍니다. 동행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활을 향한 즐겁고 희망찬 여정이길 바랍니다. 사순 의무이기에 또는 남에게 드러내기 위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이 아니라 자신이 기쁘고, 가슴 벅차게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단식하고 자선을 실천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내 주변 사람들의 아름답고 고마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긍정적인 혜안이 생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시작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코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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