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40일간의 순례

2018년 2월 18일

예수님의 고향인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온지도 벌써 1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순절 40일 간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오늘 그 첫 주일을 맞아 우리에게 선포된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1장 12-15절의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으로 부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바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간 사탄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단식과 기도로 그 유혹을 물리치고
갈릴레아로 가시오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4)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유혹과 기도를 아주 간단하게 두 줄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40일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예수님의 유혹은 다른 공관복음인 마태오와 루카복음에도 나오지만 어떤 유혹을 받으셨는지 그
유혹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관복음 모두 예수님께서 세상 구원의 공생활을 하시기 전에 40일간의 단식과
기도 그리고 유혹을 서술한데는 구약성서의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약이 이 40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성조에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계약은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만들었고, 이 계약은 모세의 영도아래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40년을 헤멘다음에야 “약속의
땅”에 도달하는 구원이 성사되었습니다. 40년의 광야 생활은 고통의 시간이며 유혹의
시간입니다. 이는 또한 궁극적으로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는 변화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고난과 유혹을 견디어 약속의 땅을 얻어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40년은 변화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성조 이전에 노아의 시대에 세상이 썩어 하느님께서 홍수의 벌을 내리셨을 때에
40일 밤낮으로 비가오고 세상은 물에 잠겼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은 노아는
방주안에서 가족과 모든 생물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좁은 방주안에서 40일 밤낮을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은 바로 살았다는 기쁨보다. 모든 동식물들과 함께 견디어내는 고통과
유혹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비둘기가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왔을 때 비로서
살았음을 실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무지개를 표징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더이상 물로
벌하지 않고 구하시겠다는 계약의 말씀을 노아에게 하십니다. 이 노아와의 계약은 바로 하느님의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약속의 신학적 근간이 되는 중요한 계약입니다.
이렇게 구약에서 40은 변화의 시간입니다. 바로 하느님께 온전히 귀의하여 구원을 받는
시간입니다. 선택의 시간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택하는 아주 절실한 시간입니다.
우리의 사순시기도 바로 이렇게 절실한 시간이 되어야합니다. 남들이 하니까, 교회의
의무이니까, 적당히 여행가듯, 산책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아닙니다. 40일의
시간은 삶을 위한, 진정한 자유를 위한 절실한 시간이며, 이 절실함이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안에
변화를 시키는 기적의 시간입니다.
적당한 결심에는 적당한 유혹과 고난이 따르지만, 절실한 결심 앞에는 더 큰 고난과 유혹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열매 또한 상반됩니다. 적당함에는 변화가 없지만 절실함에는 변화가
따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절실함은 바로 약속의 땅의 기적이 따릅니다. 나아가 그

절실함은 바로 예수님 부활의 기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위해 고난과 유혹을
이겨내는 믿음과 회개가 바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공관복음의 예수님 유혹의 첫번째 유혹은 40일간 단식을 하고 있는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변화시키라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빵만으로 살지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대응합니다. 나머지 두 유혹은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과 세상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그런데
마태오와 루카 복음의 3가지 유혹은 똑같지만 그 순서는 다릅니다. 이렇게 세복음이 다르게
유혹을 설명하는 것은 그 독자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강조하는 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후 광야에서 40일도안 단식하며 기도하시면서 3가지 극심한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 유혹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구원사업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이 위의 세
공관복음사가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마르코 복음은 로마에서 극도로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박해에 직면한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을 고양시켜 그 난관을 극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고, 마태오는 이방인 지역에서 나름 열심히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 살아가는
유태인에게 선교하기 위해 썼으며, 루카는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설명하며 전교하기 위해
썼습니다.
루카복음의 독자들은 당시 이방인 사회에 만연한 현세구복의 다신신앙을 믿는 사람들에게
유일신이신 하느님과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경륜을 알리며 선교하려는 의도였기에
예수님의 탄생이 비교적 자세하며 성모님 위주로 서술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가
창세기 아담까지 올라가 모든 인류는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역설합니다.
현세구복의 이방인들은 하느님을 시험할 정도로 하느님에 대한 신심이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사회적 성공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무엇보다
경계해야 하는 것은 세상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은 빵에 대한 유혹 다음에
세상 권력에 대한 유혹을 하느님을 시험하는 유혹 앞에 서술합니다.
그렇지만 마태오 복음의 유혹은 빵의 유혹 다음에 하느님을 시험하는 유혹이 나옵니다. 바로
하느님에 대한 신심이 강한 유대인들에 들려주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교만해지기도 하고 하느님께 섭섭해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신앙을 비교하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이는 바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믿으니 하느님은 내가
기도하는 대로 들어주셔야 한다는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는 참 위험한 생각입니다. 신심이 깊어질 수록 우리는 겸손해져야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겸손이 중요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우리의
말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말은 서로에 상처를 주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무거워 보이지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말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입에 담아야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워 집니다.
그러므로 루카와 마태오 복음 공통으로 빵의 유혹이 먼저 나온 이유입니다. 40일 단식으로
배고픈이에게 돌이라도 빵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돌이 빵이 되는 것은 당장 좋지만
영원한 삶을 약속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하시고 빵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따라서 믿는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사순절 첫 주일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매년 사순절을 지내면서 적당히 의무적인 사순재계를
하는지 반성해보아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광야에서 처절한 고난과 기도 그리고 유혹을 이겨내고
세상에 선포합니다. “때가 되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번
사순절을 예수님께서 이겨낸 유혹을 발판으로 진정으로 변화의 시간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믿음이 절실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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