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광야를 건너......

2018년 3월 11일

부활의 희망을 향해 우리는 40일간 순례의 길 한 가운데 서있습니다. 사순의 순례 여정은 현재 삶의
변화에 대한 갈망입니다.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일상의 무게에 힘들어 서로 힘들게하는 아집과
분노와 미움과 분란의 일상에서 화해와 배려 사랑과 관용의 평화의 삶으로 변화는 과정이
편치않은 광야를 통과하는 고통과 어려움이라면 그 광야의 저편에 있는 그 ‘약속의 땅’으로의
순례는 함께 더불어 의지하며 가야만 하는 우리 믿는이들의 숙명적 여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순례의 여정은 쉽지만은 않은 고난의 길일 수도 있고 그래서 불만이 가득한 길 일수도
있지만, 그 고난과 불편은 바로 ‘회개’라고 하는 변화와 성장에 대한 저항의 고통입니다. 현재의
익숙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저항은 익숙치 않은 불편한 고통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제자리에 안주하거나 과거로 회귀하면 변화는 없습니다. 그러면 희망은 그저 망상으로
끝나버립니다. 결국 편안하고 익숙한 고통에 안주합니다. 마치 가시로 덮힌 밤송이 같이
방어적이고 자격지심에 빠집니다. 그 안주의 열매는 아집과 분노와 분란과 미움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여정은 하느님께로의 귀의이며 회개입니다. 이 회개의 중심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우리 여정의 방향이며 목적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 바로우리 여정의 시작이며 과정이면 끝입니다.
3500여년전 아브라함 성조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의 고통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해방시킬 때에 광야를 헤멜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해방감은 잠시였습니다. 광야의
거친 삶은 오히려 노예시절의 익숙한 고통을 그리워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하느님과
모세에 불평합니다.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 5) 이에 분노하신 하느님은 불 뱀을 보내어 처벌합니다. 결국
하느님께 용서를 빌며 살려달라 간청합니다.
하느님께서그 기도를 들어주시어 구원의 방법을 모세에게 알려줍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위에 달아 놓았고 이를 본 뱀에 물린 백성은 살게되었습니다.
기둥위에 들어올려진 구리뱀은 바로 하느님 말씀의 현존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따를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높이 들어올려진 구리뱀을 보는 것은 바로 하느님 말씀으로의
회개입니다. 따라서 죽음으로 부터 살아날 수 있던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구리뱀을 표징으로 드러낸 하느님
말씀의 현존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들어 오려짐도 그 말씀의 현존이며
구원의 복음임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지난 3주간의 복음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의 표징인 구리뱀을 보고도 살아났다면, 들여 올려진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믿음이 향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사순여정은 이스라엘 백성 처럼 불편하고 고된 광야로의 여정이고 그 광야는 변화의
장이고 그 여정은 변화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여정의 끝에 회개의 불편함은 익숙함이 되어
말씀안에 우리 삶이 이루질 것입니다. 바로 부활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불편함을 무릅쓰고 멈추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며 그 옛날 투덜거리면서도 광야를 넘어
약속의 땅에 다다렀던 이스라엘 백성 무리처럼 우리는 함께 더불어 광야를 순례합니다. 들어
올려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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