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시작

2018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일 전례력의 막바지에 이르러 예수님은 오늘 복음(마르코 13: 24-32)에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십니다. 이는 다음 주일 올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서곡과 같은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죽음과 부활”입니다. 즉 멸망은 끝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무거운 복음은 절망이 아니라 역설적이고 희망의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지난 주말 8명의 봉사자들과 서인도 제도에 위치한 아이티의 수도 포토프린스(Port-au-Prince)에서 한국의 꽃동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꽃동네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이곳에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일상생활이 힘들며 가족이 없는 남녀노소 모두 200여 명이 넘는 식구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아이티라는 나라 자체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가난한 나라이기에 보통 사람들도 살기 힘든 곳입니다. 따라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을 위한 복지는 생각하기 힘들고 오히려 사회의 짐이 되는 곳입니다. 성경의 나병 환자나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등의 장애인이 죄인 취급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고 치유해주심으로서 사회와 화해시킵니다. 아이티의 꽃동네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치유의 안식처였습니다. 의료팀을 중심으로 한 우리 봉사자들은 필요한 치료를 해주고 돌봐주는 봉사를 통해 그들의 아픔과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는 봉사자 자신의 열성적 은총도 포함합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하느님의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본당 의료 선교팀이 매년 방문하는 볼리비아의 산안토기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지선교 중심의 꽃동네와는 달리 대구 대교구의 신부님들이 현지의 외딴 산골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신앙의 성사 중심의 선교를 하는 곳입니다. 그들 또한 경제적 지리적으로 의료혜택을 받기 힘든 사람들로 갈 때마다 거의 천여 명의 주민을 봅니다. 많은 이들이 산길을 몇 시간을 걸어서 옵니다. 그리고 심각한 환자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열악한 식생활로 위장병이나 과로로 인한 근육통을 호소합니다. 그들이 받아가는 위장약과 진통제로 위로를 받지만 더 큰 위로와 치유는 그들의 고통을 누군가가 들어줬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치료가 아니더라도 받아가는 비타민이나 약의 양이 그리 많지 않더라도 그들의 눈은 고마운 마음으로 빛나고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함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치유와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하느님은 당신이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결국 우리 기도의 응답인 것입니다. 선교의 기본은 주는 것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선교는 가르침이 아니라 배움입니다. 선교는 동정이 아니라 배려와 사랑입니다. 따라서 선교는 사랑을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은총의 보고라는 생각입니다. 결국 그 은총은 그들을 도와줬다는 뿌듯함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 하느님은 계신다는 진리의 깨달음입니다. 가장 약한 이들이 세상의 버림을 받아도 하느님은 버리지 않는다는 사랑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우리 믿는 사람들 각자가 행동할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 행동은 어느 성인의 엄청난 기적이 아니어도 아주 작은 믿음의 소유자라도 그의 아주 사소한 행동 말 한마디가 세상을 더 밝기하고 더 살만하고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영웅에 의해 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작고 보잘것 없는 백성의 믿음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의 3년간의 짧은 공생활이 시공을 뛰어넘어 그토록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작은 이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삶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면 하느님은 희망을 주십니다. 종말론은 바로 파멸과 멸망의 메시지가 아니라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종말론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오지만 우리 개개인은 그 종말적인 순간을 우리 삶에서 경험합니다. 그 순간순간 삶의 무게에 쓰러지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파괴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종말을 경험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 안에 갇혀버립니다. 스스로를 탓하고 남을 탓하고 …… 그래서 하느님의 응답을 듣지 못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합니다. 마치 환자가 의사의 말을 듣지 않아 병을 더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고별 교훈으로 제자들에게 종말을 예고하십니다. 그 종말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마르코 13: 27) 라고 말씀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선택받은 이들”은 바로 우리 믿는 이들 모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우리 각자를 선택하셨다고 천명하십니다. (참조 요한 15: 16) 그리고 당신의 말씀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십니다. 그 말씀을 믿는 우리는 결코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으리라는 확신에 찬 교훈입니다. 따라서 종말론은 혹세무민의 협박이 아니라 비관론자의 변명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입니다. 이 말씀을 당신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증명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이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자갈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결국 말라 죽듯이 고난과 절망적인 순간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안에 갇혀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르침이나 평가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배려와 이해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웃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회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와 구원입니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2016년 11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도록 선포하였습니다. 경제적 절망에 빠진 이들에 고통에 배타적 비판이나 동정이 아니라 포용적 배려와 나눔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시고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는 우리 믿는 이들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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