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세례 축일

2019년 1월 13일

오늘은 성탄절을 마치고 전례 연중 시기를 시작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세상 구원의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루카 3: 16)

이렇게 세례자 요한에 의해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복음적으로는 두 번째 세상에 드러나는 공현입니다. 첫 번째는 지난 주일 지낸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에 의해 전해진 이 공현은 예수님께서 태어난 후 1-2년 사이에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 의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정체가 드러납니다.

복음에 드러나는 이 두 공현은 초기 교회부터 성탄과 관련하여 서로 다른 전례적 전통을 낳게 됩니다. 동방박사를 통한 공현은 서방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더 유행하고, 예수님의 세례는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교회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주님 공현과 세례가 같은 날에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에 우리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주님 세례가 연중의 시작 주일이 된 것은 상대적으로 현대에 이르러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주님 공현 축일 후 다음 주일로 정착된 전례력에 따른 것입니다.

주님의 세례에서 드러나듯이 세례자 요한은 그때까지 유대교의 정결례 예식의 하나인 세례를 사람들에게 회개의 상징으로 베풀었고 이에 예수님도 동참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예언처럼 예수님의 세례는 정결례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단순한 회개의 상징이 아니라 “성령과 불로 주시”는 세례로 일생에 단 한 번만으로 족한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영세입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는 새로운 삶의 세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세례를 통하여 세상에 하느님의 자녀로 공적으로 드러나는 공현을 경험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우리의 정체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같은 삶, 즉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바로 세례를 통해 세상에 공현 된 우리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중 시기의 시작을 이렇게 예수님의 세례로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우리가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그것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도록 일 년 내내 노력하여 변화되는 삶이 바로 믿는 이들의 삶이고 크리스천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새해 새달도 어느덧 중순으로 접어듭니다. 시간은 참 덧없이 흐르고 우리의 삶도 그렇게 빨리 흘러갑니다. 그래도 우리가 잃지 않고 언제나 움켜쥐고 간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가장 힘들 때, 가장 슬플 때, 가장 억울하고 화가 날 때에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 즉 예수님입니다. 그 말씀에 위로받고 힘을 얻어 내일의 희망을 안고 오늘을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면, 하루가 지날 때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번지고, 우리의 삶은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한 단순히 말씀에서 위로받고 힘을 얻고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우리 곁의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희망의 씨앗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근간은 말씀입니다. 행복한 삶의 비결입니다.위로받는 것보다 위로하는 삶이 더 행복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힘겨운 하루를 지내고 지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3: 22)

그리고 또 하루가 밝아오면 넉넉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로 집을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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