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주일

2018년 10월 21일

오늘은 연중 제29주일이면서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드리는 “전교주일”입니다. 전교는 우리 교회의 가장중요한 사업이면서 믿는 이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에 하나입니다.

이에 오늘 복음 말씀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마지막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28: 19-20)

예수님은 제자들과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기쁜 소식” 즉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즉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어 더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 바로 예수님 공생활의 주요 사업입니다.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은 갈릴래아 여러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복음과 함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바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어 복음의 진리를 믿고 따르도록 하는 주요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적은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동반하는 하느님 말씀의 실천이었습니다. 죽은 이를 살리실 때에도 죽은 이가 불쌍하기도 하였지만 그를 사랑하는 가족이 불쌍하고 안타까워 살려주십니다. 그리고 눈먼 사람들과 절름발이를 고쳐주시는 것은 바로 그들의 생존권을 되돌려 주는 자비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믿는 이들을 구원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구원의 열쇠는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신앙 실천인 것입니다.  오늘 제 2독서에 바오로 성인은 역설하십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10: 14-15)

복음은 예수님의 기적이 전부가 아닙니다. 기적은 말씀을 믿을 말씀임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기적이 없어도 하느님의말씀은 구원의 힘있는 진리입니다. 바로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기적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신기한 기적을 쫓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신비한 경험을 하길 좋아하지만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는 이들을 만납니다. 이러한 신비한 기적과 신비한 경험은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온전히실천하는 데 그 의미가 있음을 잊게되면 빈 껍데기 신앙이 되어버립니다.

우리의 신앙은 중심인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사랑입니다. 바오로 성인도 말씀하셨듯이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코린토 13: 1)

지난 10월 17일 성 베드로 성당의 수요 일반 알현 강론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사람을 죽이는 것이 누군가를 파괴하고, 억압하고,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살인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를) 보살피고, 가치 있게 여기고, 포용하고, 용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10계명의 살인을 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살인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즉 교황님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살인 만을 일컫는 것이나 이외 누군가를 파괴하고 억압하고 제거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파괴와 억압은 권력의 남용이나 육체적 또는 언어의 폭력을 포함합니다. 나아가 질투는 이기적 사심은 패거리를 만들고 편을 가르게 됩니다. 이 또한 광의의 살인입니다.

즉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는 이기적인 관계 안에서는 이 계명은 죽은 나뭇가지처럼 죽은 말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이 계명은 바로 사랑 실천의 첫째가 됩니다. 바로 보편적 포용과 용서의 화합이 바로 살인을 하지않는 의미를 말합니다.

따라서 죽이지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 이 계명의 역설적 의미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복음의 전교는 단순히 ‘하느님은 창조주이고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니 믿으십시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또는 “Know God, know peace; no God, no peace.”라는 단순 이분법적 웅변도 아닙니다. 그 말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이는 바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말씀을 녹음기처럼 되뇌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 삶 자체가 어느 목소리보다 큰 소리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교하게 됩니다.

바오로 성인께서 소아시아와 그리스, 로마까지 전교 여행을 다니며 역설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전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믿는 이들이 완벽하고 온전하게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완벽해져 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우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매일 발전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무개에 쓰러지고 실패하고 죄를 짓지만 우리는 회개하며다시 일어나 앞으로 가는 부활을 믿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불가능은 없음을 알게 됩니다.

바오로 성인의 말씀대로 이렇게 좋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만 믿고 우리끼리만 즐긴다면 이 또한 이기적이고 하느님의 말씀에 반하는 신앙입니다. 우리 믿음의 중심인 하느님의 사랑은 나눔으로 비롯됩니다. 보편적 나눔은 바로 자비의 실천이며 완성의 첫걸음입니다. 그 사랑은 나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시작하고 내 가장 가까운 사람 그리고 점점 넓혀 세상 끝까지 그 사랑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합니다. 그래서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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