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3년 12월 3일

“하느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저를 맡기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원수들이 저를 보고 좋아라 날뛰지 못하게 하소서. 당신께 바라는 이는 아무도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이다.” 대림 제1주일 입당송 (시편 25(24): 1-4)

  오늘 전례력으로 새해 첫 주일인 대림 제1주일을 위의 입당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위의 시편 노래처럼 우리 구원을 고대하며 메시아 예수님께서 어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시작이며 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천 년 전 성령으로 성모님께 잉태되어 우리 세상에 오시어 구원이 시작되었고, 다시 오실 때 그 구원 사업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 전 가장 지저분하고 낮고 하찮은 우리에서 태어나서 가축의 먹이통인 구유에 뉘어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구세주인 아기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과 희망의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분이 오셨음을 기뻐하며 다시 오실 날을 기대합니다. 우리 기다림의 이유입니다. 구원!

  모든 것은 기다림으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깊은 심연에서 천지창조의 때를 기다리신 하느님의 때는 지루함과 설렘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바심 나게 그때를 기다리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조병화 시인은 기다림을 당신의 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지루할 거다

그 기다림이 너무나 먼 인생은

또한 지루할 거다

그 기다림이 오지 않는 인생은

더욱 더 지루할 거다

 

지루함을 이겨내는 인생을 살려면

항상 생생히 살아 있어야 한다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그 무엇을 스스로 찾고 있어야 한다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산다는 걸 잠시도 잊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모습을

항상 보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조병화 시인의 “지루함”]

  우리는 현재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 해봅니다. 지루한 삶? 설레는 삶? 현실은 지루함과 설렘이 날실과 씨실이 되어 교차하며 인생의 옷감이 짜지는 것 같습니다. 지루함과 설렘이 잘 배열될 때, 옷감은 거칠지 않고 아름다운 무늬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시작도 기다림입니다. 산모가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온갖 불편함과 고통을 기꺼이 견디어 내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언제나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목적을 아는 이는 희망이 있고, 목적을 잃은 이는 그저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이는 설렐 것이고, 희망을 잃은 이는 지루할 것입니다.

  조병화 시인의 삶 속에서 깨달은 기다림의 설렘과 지루함의 지혜는 바로 예수님께서 항상 말씀하신 기다림의 자세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오늘의 복음에서도 이처럼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중략]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마태오 13: 33-37)

  깨어 기도하는 이는 스스로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기도의 시작은 위의 입당송처럼 언제나 나를 위협하는 세상으로부터 구원입니다. 하느님께 안전과 평화를 갈구하며, 기도를 시작하지만, 그 기도는 이내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시선이 바뀝니다. 하느님께서 자신과 언제나 함께 계심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기도가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가 지루한 기다림이고, 설레는 기다림이며, 초조하게 하는 기다림입니다.

  결국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현재의 모습을 찾고, 그 변화를 관찰한다는 것은 자기 성찰이며 자기 반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변화의 시작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구원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예수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러니 그 기다림이 설렐 수 있고, 마음이 초조해 지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초조하고 지루한 기다림을 인내로 버텨낼 수 있는 비법으로 믿음 공동체를 제시합니다. 두셋이 모여 함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들과 함께 계시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두셋 이상이 모여 함께 걸어가는 구도의 길을 통해 그 목적지까지 역경을 극복하고 인내하며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듣는 말: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멀리 못 가고, 둘이 가면 늦어지지만 멀리 갈 수 있다.” 우리는 함께 가는 사람들입니다. 부부가 함께 가고, 부모 자식이 함께 가고, 친구 동료와 함께 가고, 믿음 공동체와 함께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러니 길동무가 필요한 여정입니다.

  예수님도 혼자 가지 않으셨습니다. 구원 사업의 시작으로 제자들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세상을 주유하시며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독불장군이 아니라 함께 가는 길입니다. 장난감 가게에서 자기가 갖고 싶은 장난감을 사달라고 울며 떼쓰는 아이처럼 화내고 짜증 내며 자기 멋대로 하려는 사람이나, 자신이 힘들과 아픈 것만 알아달라고 떼쓰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믿는 이들의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여정은 자비와 배려의 여정입니다. 내 주장이 중요한 것처럼 남의 주장도 들어줄 가치가 있습니다. 내가 아프고 힘든 것처럼 내 옆에 사람도 아프고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해 줘야 합니다. 부부는 아이들의 부모이기에 함께 사는 경제 공동체가 아닙니다.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서로 배려하고 아껴주는 공동체입니다. 서로에게 고마워하고 위해주는 공동체입니다. 배려와 사랑은 자식들에게 전해지고, 그들도 그런 사랑의 가족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입니다. 그 여정이 바로 기다림의 여정입니다.

  기다림은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기다림은 오히려 희망을 찾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준비하는 동적인 행동입니다.

  오늘 깨어 구세주 예수님을 기다리는 설레고 지루한 기다림의 시작합니다. 기다림의 설렘은 우리의 선택이고, 그 길을 잃을 때 기다림은 지루함이 됩니다. 그러니 소풍 가는 날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설렘과 초조함으로 서로 위로하고 배려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과 평화의 기다림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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