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3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일로 연령의 달인 11월 첫째 주일을 지냅니다. 모든 성인 축일로 시작한 11월은 가을을 갈무리하며 겨울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죽음을 묵상하기에 참 좋은 달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 묵상은 생명에 관한 묵상입니다. 그러므로 쓸쓸함과 외로움이 아니라 고즈넉한 가을 저녁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와 묵상 같습니다.

  가을은 양면의 계절입니다.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이고, 사색의 계절이지만,  왕성한 여름을 보내고 겨울을 준비하면서 고독과 죽음을 생각게 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대조적인 것 모두가 주님과 함께라면 희망을 이유가 됩니다. 다가오는 겨울이 춥고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이는 다가오는 봄의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가을의 아름다움은 역시 우리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지세를 다시금 신앙으로 고찰하는 기회를 주는 계절입니다.

  주님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는 신자는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름다운 이유는 남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남에게 희망을 나누어 주는 것이고, 희망을 나누어 주는 것은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름다운 이유는 자기 잘못을 회개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들어주고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남의 잘못을 들어주고 용서해 주는 것은 새로운 삶을 주는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도 남의 잘못을 들어주고 용서해 주는 아량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를 통해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구세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기에 가능한 삶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온 마음과 온 정신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의 무게를 믿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우리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주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 23: 2-3)

  말을 듣고 믿었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 남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우기에 위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23: 4-5)

  남에게 잘 보여 자신을 드러나게 하려는 노력은 누구나 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입니다. 그러나 이 욕망이 위선이 되고, 나아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다가 오히려 남을 험담하고 심판하며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위선을 넘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악인으로 변질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를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따르되 겸손하고 자비심으로 남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23: 11-12)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또 이런 각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을 가벼이 보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섬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마태오 20: 28) 사실 사제 서품을 받을 때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제품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받는 것이다.” 당연합니다. 사제가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지 않으면, 누가 백성을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하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으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위선적인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아가 섬김을 받은 이는 또 남을 섬겨야 합니다. 섬김은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은혜를 갚는 길은 다른 이들에게 주님께 받은 은총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겸손은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보이는 비굴한 모습이 아닙니다. 겸손은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남을 존중해 주는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겸손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라 착각하는 이가 있습니다. 또한 겸손한 사람을 얕잡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겸손할 자격이 없는 삶들의 행동입니다. 그들은 자긍심이 없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유 없이 방어적으로 되거나, 공격적으로 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당해야 합니다.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격지심이 열등감에서 기인한 자기방어적 교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존중하기 때문에 드러나는  당당함입니다. 나아가 이는 하느님과 함께하기 때문에 가능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완벽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약점이 있고,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이를 감추려 하면 할수록 자격지심에 기인한 편견과 교만에 빠져 스스로를 파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함께라면 자신의 약점과 부족한 점을 완전히 드러내 고치려 하고, 자신의 장점을 더욱 발전시킵니다. 그래서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이 없고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약점을 감싸주시고 용기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겸손할 수 있는 당당함은 하느님 앞에서 솔직한 자신을 완전히 드러낼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이는 또 나아가 겸손한 사람을 존중해 줄줄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 실천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오 2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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