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3년 9월 3일

구월의 시작에 서서 Labor Day 주말을 즐기며 여름을 보내고 가을맞이 준비를 합니다. 선선한 날씨지만 그래도 햇살은 따가워서 그늘을 찾게 됩니다.

  지난 금요일 오후에 잠시 짬을 내어 동네 한 바퀴 산책했습니다. 매일 사목 단상에 산책이 좋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할 짬을 내지 못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심적 여유일 것입니다.

  파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 가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최적의 날씨를 즐기러 밖으로 나가 인도를 따라 걷기 시작합니다. 조금 걷다 보니 아직 여름이라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작열하는 태양의 따가운 햇살에 계속해서 그늘을 찾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한참 걷다 보니 한 노인이 커다란 자루를 메고 이집 저집을 둘러보며 갑니다. 자세히 보니 각 집의 쓰레기통에서 빈 플라스틱 물병을 찾아 자루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계산을 해봅니다. 빈 플라스틱병 하나에 5전, 10개 면 50전, 100개 면 5불…. 하루에 천 개는 모아야 50불이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력에 비해 채산성이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노인은 열심히 쓰레기통을 뒤지며 빈 병을 모으며 동네에 다닙니다.

  그 노인을 뒤로하고 계속 앞으로 걸으며 생각해 봅니다. 그 노인의 행동을 통해서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노느니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운동도 하고 용돈도 벌고 하면 소위 “꿩 먹고, 알 먹고” 식의 일석이조의 이익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과 함께 또 다른 생각이 떠오릅니다. 병을 수집하는 것을 돈에만 결부하니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빈 물병을 수거하여 반납하는 데 5센트를 주는 것은 그 물을 산 사람이 이미 물병값으로 5센트를 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병을 갖다주면 맡긴 5전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낸 돈을, 병을 주워 온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유는 재생을 통한 자연보호입니다.

  그 노인이 하는 일은 결국 우리가 안 하는 리사이클을 통한 자연보호입니다. 고마운 분입니다. 우리는 금액만 보고 물병을 그냥 버립니다. 빈 병을 들고 슈퍼에 가서 돈으로 바꾸는 것을 창피해하는 분도 많습니다. 우리가 맡긴 돈을 찾아오는 것이고, 또 자연을 보호하는 일인데도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는 집 쓰레기통이 집 앞 잘 보이는 곳에 놓였는데, 플라스틱 물병이 가득했습니다. 이를 보자 아까 그 노인이 생각났습니다. “이 집에 오면 대박인데……” 하며 나중에라도 이곳에 오길 기대하며 지나갑니다.

  자연보호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우리의 생활 터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잘 가꾸며 살아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장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렇기에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경쟁자로 여깁니다. 그렇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보면 누군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 누군가가 자신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가장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 이브를 창조하시고 서로 한 몸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생기자 서로 책임을 전가합니다. 자신의 생명이 먼저인 것입니다. 같은 형제 사이라도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을 때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불편해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의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이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라고 믿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은 그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서로가 경쟁상대가 아니라 사랑의 상대이며 구원의 동반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경쟁 상대로 여겨 반대하고 미워하며 결국 다른 종파와 결탁하여 예수님을 죽일 때도, 예수님은 그들 스스로 지옥을 향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능력뿐만 아니라 저주의 능력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지만 심판자이기도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쓸모없다고 저주하시자마자 죽은 사건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누구도 저주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니 불행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 스스로 구원이 아니라 심판의 길로 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당신 구원의 대장정의 끝이 다가옴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마태오 16: 21)

  예수님은 응징이 아니라 희생을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인 하느님은 인간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구원의 클라이맥스가 바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예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다혈질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반박까지 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16: 22)

  베드로의 이 말은 진심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존경하고 믿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뜻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베드로를 오히려 질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를 사탄이라고까지 강하게 질타하십니다. 그만큼 베드로의 반박은 예수님께 유혹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영원히 살고 싶어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의 꿈입니다.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하여 다 가진 진시황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듯이 보였지 보였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갖지 못한 것은 불로장생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예고 직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반박한 베드로는 정작 예수님께서 잡히시어 수난을 당할 때, 그들이 무서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베드로는 가장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낸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우리를 가장 약하게 하고, 유혹에 빠지게 하며, 악마의 제자가 되게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믿었지만 죽음에 직면하여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아직도 제자들은 수난과 죽음은 이해하지만 ‘부활’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은 불로장생이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강하고 열심히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더라도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아무리 우리가 몸에 좋은 것만 먹고 열심히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 늙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생각하지도 못한 때에 주님께 돌아갑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구원의 신비는 ‘부활’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바로 부활을 통해서입니다. 소위 말하는 불로장생은 부활 후의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16: 24) 나아가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16: 25)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다음에 오는 부활은 바로 우리 구원의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꿈입니다. 우리 신앙의 이유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경쟁자가 아니라 협조자입니다. 서로 이용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편리함과 안전함만 추구하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경쟁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속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거룩해집니다. (참조 로마서 12: 1-2) 그렇게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내일 노동절 휴일을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모여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길 바랍니다. 그 행복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경쟁이 아니라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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