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3년 8월 27일

오늘은 연중 제21주일로 팔월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며 아름다운 가을의 길목, 구월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또 한 달이 지나고, 한 계절이 지나감은 우리가 열매가 익어가듯 우리도 성숙해진다는 말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숙해지는 거름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팔월의 비가 뜨거운 태양에 메마른 땅에서 흩어져 나온 먼지를 씻어버리듯이,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덮은 먼지를 시원하게 씻어버리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성을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베드로 사도의 고백은 이것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인이십니다.”(마태오 16: 16)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 16: 17-19)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 바르요나였으나, 오늘을 계기로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이는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즉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은 베드로 사도를 수장으로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용서의 권한을 주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으로 임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권한을 승계받은 이가 바로 교황입니다. 즉 베드로 사도는 제1대 교황이 되는 것입니다.

교황의 권한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의 3대 거장 중 한 사람인 미칼란젤로의 미술과 관련하여 전해집니다.

미켈란젤로 조각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당시 교황 율리오 2세의 명으로 바티칸 궁전의 대경당인 시스틴 경당에 성화를 그리게 됩니다. 그때 그린 벽화가 천지창조와 세상 종말을 그린 최후의 심판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완성되었을 때, 예수님을 포함하여 모든 인물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교황 바오로 3세의 비서인 체세나 추기경이 이를 거룩한 성전에 맞지 않고 홍등가에나 있을 법한 그림이라고 혹평하자, 미칼란젤로는 소소한 복수를 합니다. 그 추기경의 얼굴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모습대로 지옥을 지키는 ‘미노스’에 그려 넣은 것입니다.

이를 본 체세나 추기경은 화가 나서 당시 교황인 바오로 3세에게 찾아가 자기 얼굴을 빼달라고 청원 했지만,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좋아했던 교황은 추기경을 비꼬며 이렇게 거절합니다. “나는 지상과 하늘나라에 관한 권한은 있지만, 지옥에 관한 권한은 없다네.” 그렇게 체세나 추기경의 얼굴은 오늘날까지 미노스의 일그러진 얼굴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미켈란젤로 사후 체세나 추기경의 혹평대로 많은 이들이 나체를 흉측하게 여겨 주요 부분들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자존심 강한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소소한 복수와 역사의 굴레바퀴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사실에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교황의 문장에는 언제나 열쇠가 두 개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권위와 힘을 상징하며, 왼쪽 은색 열쇠는 지상에서의 권위를 나타내며, 오른쪽 금색 열쇠는 하늘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참고로 두 열쇠를 묶고 있는 매듭은 두 권위의 조화를 들어냅니다.

예수님 구원의 요체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해 주려는 배려이며, 상대방을 도우려는 자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존심을 마주칩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며 자신을 드러냅니다. 나아가 남을 깎아내리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합니다. 이것이 그 알량한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이 강하면 자신의 아집에 갇혀버립니다. 그리고 나가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재능에서 나오는 오만함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예술적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예술가적 고집이 필요하지만, 그의 그림 안에는 여러 사람의 얼굴을 모델로 등장하는 데, 자신을 힘들게 하거나 자신의 그림을 혹평하거나 한 사람들을 모욕적으로 그려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오만함은 그의 20대 때 만든 걸작품인 피에타 조각상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중심인 성모님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에 새겨넣었습니다. “피렌체 사람 미칼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 이는 젊은 천재의 치기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으로 훗날 스스로후회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존심 대신에 자존감을 느끼라고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시며, 또 ‘너희는 왜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저쪽으로 옮겨가라 해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는 예수님 중심의 자존감입니다.

우리가 완벽하기에 귀한 존재가 아니라 부족하더라 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기에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드러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남을 깎아내리면서까지 자신을 드러내는 오류를 범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면 하느님께서 그를 더욱 귀하게 만드시리라는 것입니다. 자존심과 이기심이 만연한 곳에서 겸손한 자존감은 오히려 그들에게 바보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에는 자존심이 강한 이들이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자존감은 스스로를 겸손하게 하여, 남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따라서 자존심은 관계를 불안하게 하고 경쟁하게 하며 서로 상처를 주게 되지만, 자존감은 관계를 편안하게 하고, 서로 돕게 하며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구세주라는 사실을 제자들 앞에서 인정하십니다. 이는 그 분의 권위가 사람들에게 권세와 세도를 부리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하게 세상을 위하여 희생하며 용서하여 모두를 하느님의 자녀로 구원하려는 권위입니다.

그 권위를 베드로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반석 위에 세워진 예수님의 교회인 우리도 자존심을 내세워 남을 심판하고 비방하기보다, 주님의 사랑으로 각자의 자존감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귀한 존재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신비로운 몸으로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선에 선 역군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자존감은 이것입니다. 우리 각자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저 자신처럼 사랑하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아들과 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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