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3년 7월 23일

오늘은 연중 제16주일로 7월도 하순으로 접어듭니다. 7월이 가면 장마철같이 날씨도 따라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높은 습도가 주는 불편함이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불편함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하느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난 주일에 본당 설립 50주년을 행사의 하나로 ‘성경 골든벨’이라는 퀴즈대회가 성황리에 이루어졌습니다. 참가자와 응원하는 신자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퀴즈를 풀어가면서 긴장감과 성취감의 기쁨을 함께 누렸습니다.

  어떤 문제는 재미로, 어떤 문제는 교회 상식으로, 재미를 더해 갔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두 팀이 요한복음 1장 1절을 쓰는 주관식 문제였는데, 이를 아주 정확하게 맞춘 팀이 최종 승자가 되었습니다.

  참가들이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동안 긴장감과 재미가 어느 퀴즈쇼를 보는 것보다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참가자들이 참가 상품을 받고, 응원하던 관중이 행운상을 받는 것은 기쁨을 더하는 덤이었습니다.

  Koinonia(코이노니아)는 그리스어로 ‘동료 의식’ 또는 ‘공동체 친교’ 등의 뜻을 가지며, 이는 나눔과 친밀함, 함께 참여하는 일치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이는 나아가 성체 성사를 통한 주님의 거룩한 몸으로서의 일치된 형제적 공동체를 말합니다. 즉 진정한 교회 공동체를 말합니다.

  교회는 단순한 이익집단이 아닌 그 자체로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유기적인 공동체입니다. 함께 숨 쉬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공동체로 각자 다른 개성이 모여 하느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다양성과 일치의 공동체입니다.

  이는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처럼, 각자 다른 색깔과 다른 모양의 유리 조각들이 모여 서로 다른 빛을 통과시키며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다양성은 서로 다른 모습과 다른 색깔의 성격이 모여 예수님의 빛을 통과시키면, 하나의 커다란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입니다.

  지난 주일 ‘성경 골든벨’을 통하여 진정한 코이노니아 모습을 경험했습니다. 둘이 한 조가 되어 참가한 참가자와 관중과 봉사자가 하느님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어 아쉬움의 한숨과 기쁨의 함성이 모두 아름다운 시가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이렇듯 행복은 아주 멀리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물질적 풍요는 과유불급(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으로 행복의 작은 한 부분일 뿐입니다. 행복은 함께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나눌 때 자연스레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뿌듯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이고, 이를 통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이는 또 나아가 우리 공동체가 올해 50주년을 맞아 기쁘고 행복한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런 이가 “빛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빛은 보이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빛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을 보이게 할 뿐입니다. 세상의 사물을 밝게 보면, 우리는 빛이 거기에 있음을 압니다. 빛을 볼 수 있을 때는 어둠을 뚫고 세상을 드러낼 때입니다. 그리고 빛의 아름다움은 비가 그치고 햇살이 드러날 때 하늘을 수 놓는 무지개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고 하느님을 불신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권능이 불신을 받을 때에만 당신께서는 힘을 드러내시고 그것을 아는 이들에게는 오만한 자세를 질책하십니다.” (지혜서 12 : 17)

  하느님을 불신하는 사람의 문제는 어둠 속에서 빛이 없다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여명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알더라도 이를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짙은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가슴 졸이는 사람은 이내 지쳐서 여명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을 기다리며 기도 해야 합니다. 빛의 은총을 감사하며 어둠을 이겨내고 빛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혼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어둠 속에서도 함께 더불어 계심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빛은 우리 이웃을 통해 주변을 밝혀줍니다. 이웃이 등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공동체, 코이노니아입니다.

  또한 지혜서의 말씀대로 오만한 자세를 질책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을 심판하는 이들을 질책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려는 오만을 질책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비입니다. 스스로 자비로운 것처럼 이웃에게도 자비로울 때, 하느님은 바로 거기에 함께 계십니다. 자비의 행복은 잔잔하면서도 오래 갑니다.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느닷없이 왔다 가는 짧은 행복이 아니라 잔잔하고 꾸준히 우리의 가슴을 뿌듯하게 하고 기쁘게 합니다. 이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을 주고, 어둠 속에서 여명을 기다리는 희망을 줍니다.

  악마는 짧고 강렬한 행복감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 유혹이 달콤해 보이지만, 그 뒤의 함정을 보지 못합니다. 그 유혹에 빠지면 무지개를 잡으려 온 세상을 헤매는 사람처럼 삶을 헛되이 살게 됩니다. 이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식구들까지 고난 속으로 빠트립니다. 이러한 삶이 마치 좋은 밭에서 자라나는 가라지와 같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참조 마태오 13 : 24-43)

  악마의 유혹에는 강렬한 기쁨 속에 오만과 편견이 있지만, 짧고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가득한 불안한 행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을 지키려 고군분투하지만, 더욱 외로워질 뿐입니다.

  하느님의 행복은 강렬할 때도 있지만 대개 한 여름의 미풍처럼 잔잔하게 찾아옵니다. 미풍은 잠시 땀을 식혀주며 무더위를 이기게 해줍니다. 미풍은 무더위를 피하기보다 오히려 무더위를 견디며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이 악마의 유혹과 다른 하느님의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행복에는 위로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미풍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는 여름이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에어컨 바람만 쐬며 집안에서 꼼짝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매일 가을이 언제 오나 기다리며 목만 길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미풍의 행복을 아는 이는 여름의 무더위가 힘들지만, 그 아름다움도 함께 만끽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름은 여름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면 삶이 무료해집니다. 지겨워집니다. 답답해집니다. 희망이 없어집니다. 지루한 기다림만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희망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희망의 기다림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설렘입니다. 진정한 희망은 오늘 최선을 다하며 내일을 준비할 때 설렘으로 드러납니다.

  농부가 땅에 뿌린 좋은 씨앗이 자라서 많은 수확을 얻게 하기 위해서 김매며 밭을 가꾸는 노고를 감내하며 단비에 감사하고 따가운 햇빛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다가오는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씨뿌리는 농부가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라고 예수님은 설명해 주십니다. (13 : 37) 그리고 밭에는 언제나 가라지가 자라나는 데 이를 뿌린 원수가 악마라는 것입니다. (39)

  오늘 복음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좋은 씨를 뿌리고 가꾸지만, 악마가 뿌린 가라지를 뽑아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농부는 밭에 가라지가 싹이 트고 자랄 때, 김매며 미리 정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수확 때까지 그냥 놔둔다고 하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농부의 일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옛 밀 농사는 고랑을 파고 파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밭을 갈아 흙을 부드럽게 한 다음 씨앗을 뿌려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밀이 요즘처럼 고랑 따라 줄 서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불규칙하게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밭에 들어가 밀과 비슷한 가라지를 뽑으려 하면 성한 밀을 뽑기도 하고 부러트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확 때까지 가라지를 뽑지 않고 기다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좋은 씨앗에서 자란 밀이 가라지 때문에 비록 수확이 적어지더라도 하나도 죽이지 않으려는 농부의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하늘나라의 자녀를 악마가 뿌린 가라지 때문에 한 사람도 잃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요즘 산업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합니다. 집중과 선택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목자처럼, 가라지를 뽑다 성한 밀을 다칠까 가라지를 내버려 두고 수확 때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처럼 하늘나라의 자녀를 하나도 잃지 않으려는 자비에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나라의 자녀를 희생시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희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늘의 자녀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제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성체로 다가오십니다. 생명의 양식이 되어 오십니다. 이를 받아먹는 우리가 모두 예수님의 거룩한 지체로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세상은 가라지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좋은 씨앗에서 자라난 밀은 좋은 농부인 예수님의 보호 아래 사랑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며 수확을 기다립니다.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서로 다르지만, 많은 수확을 기다리며 오늘을 인내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오 13 : 4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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