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3년 7월 2일

오늘은 연중 제13주일로 본격적인 여름, 7월을 시작합니다.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여름 방학에 들어가서 주일 성당의 오후가 예전만큼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 쬐는 조용한 성당의 기도 뜰이 상상이 갑니다. 그래도 기도 뜰의 성모님이 계시니 한여름의 오후가 오히려 포근합니다.

  지난 주일과 화요일에 저의 사제 수품 25주년을 맞아 축하해 주시고 기도해 주신 우리 본당 식구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과 함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도드립니다.

  25년간 사제 생활을 뒤돌아보며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제 생활이 심심하거나 지루할 틈이 없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매 사람이 다 다르듯이 사람들을 상대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이 매일 비슷할 것 같지만 실상은 매일 다릅니다. 사람마다 생각하고 결정하는 바가 다르고, 기대하는 바가 다르고 행동양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안에서 다양성과 일치가 공존하는 기적의 공동체입니다. 세속과 떨어져 사는 수도회가 아니 사회 속의 공동체는 세상과 성령 사이의 외줄 타기라고 표현하는 어느 신부님의 충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같기에 교회가 세속적이 되면 맛을 잃은 소금 같고, 너무 성령에 충만해지면 너무 짜서 음식을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같으니 아주 적당한 양의 성령이 필요합니다. 그 적당함이 소위 말하는 “적당주의”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적당함은 알맞은 양입니다. 최적의 맛을 내는 양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본당 주임신부는 세속과 성령의 사이의 외줄을 타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소금의 맛을 최대한 살려야 하는 직책입니다.

  때로는 조금 싱겁고, 때로는 조금 짜지만 너무 짜거나 싱겁지 않게 가장 맛있는 맛을 내려 최선을 다할 때, 하느님은 그 나머지를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지난 25년의 사제 생활을 통해 배워갑니다.

  사실 초대 교회 때부터 온전히 하느님을 경험하기 위해 광야로 또는 사막으로 떠났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먼저 오신 세례자 요한은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꿀을 먹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마태오 3: 4) 예수님도 광야로 성령에 이끌려 가시어 광야에서 40일간 사시며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이집트의 안토니오 성인은 가까운 사막으로 나가 세속과 떨어져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살았습니다. 이에 많은 이들이 안토니오 성인을 따라 사막으로 떠났고, 이것이 오늘날 수도 생활의 효시가 됩니다.

  20세기의 미국을 대표하는 수사인 토마스 머튼 신부님은 그의 저서 “고독 속의 명상”에서 삭막한 사막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막에는 오직 하느님만 존재하십니다.” 즉 온전히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 사막으로 가야 합니다.

  지난 1월 초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신부 넷이 함께 갔습니다. 이스라엘을 여러 번 가봤지만 먼발치서 보기만 했던 광야 속의 동방 정교회 소속의 성 조지(St. George) 수도원에 갈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예리코 사이의 광활한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어 그사이를 지나는 사람들을 상대로 강도가 성행했던 지역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도 이 광야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 광야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깊은 계곡에 수도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장소에 위치한 수도원에 가기 위해서 한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붙여 지은 수도원은 인간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절벽 중간 여기저기에 사람이 뚫은 듯한 동굴이 있었는데 그곳 수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예전에 수사님들이 더 깊은 기도를 위해 동굴에 칩거하며 기도 생활을 하던 곳이라 합니다.

  사실 이러한 기도 전통은 다른 종교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궁극의 구원을 위한 구도의 길을 세상과 가장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서 찾으려 한 노력입니다.  세상의 유혹에서 멀어지려는 노력이었을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옛날 많은 수사님들이 광야로 구도를 위해 들어갔는데 여기저기 각자의 동굴에서 살다 보니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떨어진 삭막한 광야가 아니라 마치 캠프촌처럼 많은 수사들이 몰리다 보니 생활 쓰레기와 여기저기 용변으로 가득해서 오물 냄새가 가득한 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초기 구도를 위해 인간 세계를 떠났는데 새로운 인간 세계를 형성한 꼴이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막에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속에서 살아갑니다. 세속의 수많은 유혹 속에서 진실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진정한 행복을 하느님 안에서 찾으려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후 성령에 의해 광야로 가셨지만 유혹을 이기시고 세상으로 다시 내려오셨습니다.

  또 산에 오르시어 모세와 엘리야와 만나시어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고, 이를 본 베드로는 그 산에 같이 살자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산을 내려오십니다. 상징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세상 구원을 위하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 10: 37-39)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에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관계인 부모 자식 간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하느님과의 관계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떠나 홀로 살아가야 할 것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수사님들처럼 광야로 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으로 오셨고, 사람들과 함께 사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관계에 하느님을 뽑으십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따를 것인가, 부모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녀를 따를 것인가 하는 결정의 문제가 생깁니다.

  하느님과 세상과의 발란스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것은 사실 부모와 자식을 하느님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나 자식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부모나 자녀의 말은 세속적인 지혜이기에 하느님 말씀과 달리 이기적이고 계산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 자식을 온전히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지만 그 가치 기준은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과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외줄 타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을 통하여 그 실체를 체험합니다. 우리의 하느님 체험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 말씀 안에서 길을 잃지 않고, 또 중심을 잃지 않고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지혜에 유혹을 벗어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신의 기도 마지막에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세상의 유혹은 세상의 개인과 집단 이기주의이며, 약육강식의 논리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모인 믿음과 기도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며, 설령 유혹에 빠져 실수하더라도 용서할 수 있고, 다시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줍니다.

  영혼의 의사라고도 불리는 사제는 이러한 공동체의 리더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착한 목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제도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처럼 인간적 약점을 가졌습니다. 그렇기에 회개하고 기도하며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살려 고군분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하느님의 양들을 파란 풀밭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사제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을 때입니다. 그 사랑을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부터 경험하고, 신자들로부터 경험합니다. 비록 광야로 나가지 않고도 세상 속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세상 속의 광야입니다. 온전히 하느님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받고, 용서를 받고 해주며 구원받을 수 있는 곳, 오로지 하느님만 존재하는 세상 속의 광야입니다.

  세속적 계산으로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라 순수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어진 관계를 추구하는 세상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의 사랑이 아니라 보편적 사랑이 존재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25살배기 사제로서의 저의 책무도 바로 이 사랑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임을 잘 압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한 광야가 우리 본당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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