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3년 3월 26일

오늘은 사순 시기 제5주일을 맞이합니다. 사순 시기의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우리 각자의 기도와 선행, 등의 사순 재계를 돌아보며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기입니다. 이번 주만 지내면 주님 주일과 함께 성주간으로 접어듭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의 부활절이 다가옵니다.

  지난 주일은 장미 주일로 힘든 사순 재계의 속에 그 의미와 목적을 되새겨보는 주일로 기쁨 주일이라고 합니다. 고난의 여정은 그 목적을 상실하면 지치게 되고 길을 잃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십 일간의 여정의 목적은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함께 나누며 우리의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오늘의 고난을 기쁘게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순 시기의 가장 중요한 재계는 사랑 나눔입니다. 함께 더불어 모두가 구원을 받는 세상을 향한 여정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낙오되는 여정이 아니고, 쉼 없이 질주하는 여정도 아닙니다. 위로가 있고, 응원이 있고, 함께 쉴 때가 있고, 지친 이를 부축해주는 도움이 있어서, 믿는 이들은 아무도 낙오되지 않고 모두가 목적지까지 함께 가는 여정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당신께서 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이유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나”라는 말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깊게 느낍니다. 믿는 이들 사이에는 빈부의 격차나 권력의 유무로 차별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했다는 사실이 강자의 권력이나 세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적어도 예수님께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며 그 믿음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그 삶은 바로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 누구나 서로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사순 시기에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복음 생활 연습이 될 것입니다. 마음을 나누고, 재물을 나누고, 생명을 나누는 일들이 그렇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 본당에서 있은 헌혈 행사에 많은 이들이 동참하여서 최종 49명이 헌혈을 하였습니다. 이는 한 곳에서 적지 않은 헌혈이라고 합니다. 사실 피를 나눈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건강상 아무나 헌혈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피를 나누려는 마음 만큼은 주님께서 알아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도도 알아봐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결과만 보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알아봐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7가지 표징의 일곱 번째 기적으로 마리아와 마르타의 동생으로 죽은 나자로를 살려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죽은 이를 되살리는 기적에서 우리는 죽음 위에 계시는 하느님을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주석 성경에 의하면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를 뜻하는 히브리 말 이름 엘아자르의 그리스 말식 축약형인데, 기원후 1세기에 흔한 이름이었던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부활을 위한 과정이라는 사실도 암묵적으로 알려주십니다.

  그래서인지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상황의 위급함이나 위험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 상황이 당당하고 차분합니다. 오히려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기회라고 말씀하십니다. (참고 11: 4) 그리고 모든 것은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실 때도, 예수님은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라고 어머니께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때”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영광을 드러낼 때입니다.

  마치 꽃이 피기 위해서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햇살이 언 땅을 녹일 때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언제나 이루어질 때를 준비하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때가 되지 않았어도 어머님의 간곡한 말씀에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당면한 일을 순서대로 처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놀랍기만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신성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초월하시고, 죽음을 지배하시는 예수님의 신성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베타니에에 묻힌 라자로에게 가십니다. 그리고 뭇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리아와 마르타에게 무덤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마르타와 마리아도 감히 예수님께서 곧 자신들의 오빠 라자로를 다시 살릴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다만 부활의 믿음만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모두가 부활하여 다신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이 그때’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11: 25-26) 나라로의 죽음은 슬픈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기회임을 다시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라자로의 무덤에 당도하신 예수님은 갑자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십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슬퍼하는 광경을 보시며 마음이 심란해지고, 급기야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11: 33-35) 예수님께서 얼마나 라자로를 사랑하셨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지금까지 당당하시고 차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무덤 앞에서 흘리시는 눈물로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십니다. 하느님으로 우리의 삶 위에 계시어 경외심과 더불어 거리감이 있는 경직된 모습에서 따듯한 인간적 면모를 발견하며 한층 가까운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신성은 무감정적 존재가 아니라 너무나도 인간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의 때가 되지 않았어도 절실한 간청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인간적 슬픔을 위로해 주신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을 통해 다시 한번 더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알게 되는 “예수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영광”은 바로 당신 자신을 위한 영광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영광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신을 드러내시는 이유는 우리를 드러내시기 위함임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신앙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영광은 또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비밀입니다.

  오늘 라자로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라고 명하십니다. 그렇게 열린 무덤 안으로 기도를 하시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이 말씀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11:44) 하고 증언합니다. 그렇게 라자로는 되살아나 자신을 감은 천과 수건을 풀고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명령을 하십니다. “이리 나오너라.” 우리 마음속의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하십니다. 이를 위해 누군가가 그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워줘야 합니다. 그 누군가는 우리 이웃이며, 우리 친구이고, 식구이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며,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의심에서, 우리의 미움과 분노에서, 우리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우리의 절망에서, 세파에 지쳐 쓰러진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어두운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예수님의 외침 소리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뜻을 가진 이름, 라자로입니다. 이에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명하십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요한 11: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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