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2년 10월 2일

오늘은 연중 제27주일로 시월을 시작하는 주일입니다. 점점 가을이 깊어가면서 천고마비의 계절을 실감합니다. 길가의 코스모스도 만개하고 하늘의 흰 구름은 여러 모양으로 장식하여 하늘을 바라보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가을이 되면 버릇처럼 하늘을 자주 쳐다보게 됩니다. 그 깊이를 모르는 파란 하늘과 어디선가 바람에 밀려온 흰 구름이 조화를 이루면 어릴 적부터 많은 상상을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하늘을 바라보다 파란 하늘의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으면 마치 그 위에 하늘나라가 있을 것 같고, 작은 조각구름이 떠있으면 손오공이 타고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 구름에 가려진 하늘에 떠 있는 성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인 일본 만화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보면서 사람들의 상상은 대게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주선이 달과 화성을 넘어서 태양계 끝을 넘어 날아가는 시대에 살면서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진 시대를 살면서도 가을 하늘을 보면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만큼 깊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면서 상상은 어린아이의 전유물로 취급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상상을 하면 마치 철들지 않은 어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상은 사람을 가장 순순하게 만들면서 가장 창조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상상은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마치 허황된 상상의 이야기 같지만 결국 그것들이 어느새 우리의 일상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을 발견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상상하였던 하늘을 나는 비행체는 이미 우리의 삶에 깊이 자리 잡혀서 비행기 없는 세상은 상상이 안 될 정도입니다.

  상상은 우리 신앙에도 깊은 영향을 줍니다. 상상은 우리 신앙을 성경 속의 글자들이 우리 일상에 살아나게 합니다. 상상은 간접 경험을 나의 경험으로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시며 예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상상하면 가슴이 설레게 되어 성체 성사의 신비가 살아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받으면 입으로는 “아멘”이라고 말했지만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릴 때가 많습니다.

  상상은 또 우리의 기도가 푸념이나 빈말이 아니라 이루질 수 있는 확신의 믿음이 됩니다. 내가 하는 기도가 이루어지는 상황을 상상하면 기도를 더욱 진지하고 절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프로 운동선수들도 ‘멘탈 트레이닝’이라고 해서 필드에서 연습을 하지 못할 때 상상력을 이용하여 능력을 증가시키기도 합니다.

  상상력은 단지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아주 좋은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에서 사도들이 주님께 이런 청을 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17: 5)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엄청납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17: 6)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예수님은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너무 엄청나서 아이러니하게도 믿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정말 돌무화과나무가 뽑힐까?” 하는 의심이 먼저 들게 됩니다. 그 정도로 우리의 믿음은 약하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돌무화과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는데 필요한 믿음의 크기가 “겨자씨” 한 알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깨알보다도 훨씬 작아서 손으로 집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여담으로 예수님께서 예를 든 것 자체가 모순이 있습니다.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심는다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입니다. 바다에 심을 수도 없지만 심어도 곧 죽게 되기에 심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억지 비유를 들으셨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의미 없는 것도 믿음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 비유로 강조합니다. 믿음은 모든 것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있다”와 “없다”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있다는 사실에 중심을 둘 것이고 없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에 중점을 둘 것입니다. 두 사람의 사고방식이 상이하게 달라집니다. 또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는 믿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다는 사람은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지만, 없다는 사람은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우리 삶의 방향을 좌우합니다.

  이렇게 믿음이 중요한 데, 이 믿음을 강하게 하는 방법 또한 상상력이 중요한 몫을 차지합니다.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그 위에 상상력을 더하면 믿음이 더욱 강해집니다. 더욱 강해진 믿음은 그 결과를 더욱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굳은 믿음으로 기도를 하였는데, 그 믿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실망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단순히 믿음이 약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다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주인이 종이 음식을 차려주며 환대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 시중을 들게 하고, 이를 마친 다음에야 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간다고 해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하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참조 17: 7-10)

  옛말에 ‘진인사후 대천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바를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은 수학 공식처럼 노력의 대가가 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잠언’도 이렇게 말합니다.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16: 33)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자신이지만 그 결과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제비를 뽑아 결정한 사례는 예수님을 배반한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의 죽음으로 이를 대신할 사도를 뽑을 때입니다. 사도가 될 자격이 있는 여러 제자들이 제비를 뽑았고 이에 당선된 사도가 마티아 사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믿음’의 중요성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둘째는 믿음을 이루게 하는 최종 결정권자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내 뜻을 이루려는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믿음의 중심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도 죽음에 직면하여 게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께 죽음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도 결국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에 할 수 있었던 목숨을 건 순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당신처럼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당신의 때에 당신의 뜻에 따라 우리를 당신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중심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가을 하늘이 끝도 모르게 깊어 갑니다. 바람에 실려 온 흰 구름만이 그 깊이를 가늠하게 합니다. 흰 구름의 포근함처럼 아버지 하느님의 품이 포근할 거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삶의 무게에 지쳤을 때 우리를 안아주는 예수님의 품이 그리 포근하리라 상상해봅니다. 삶의 벽에 가로막혀 절망스러운 때에 갈라진 벽 사이로 비치는 빛이 예수님의 손짓이길 상상해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의 찌그러진 어깨를 툭툭 치며 빙그레 웃는 얼굴로 우릴 꼭 안아 주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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