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부활의 서곡

2019년 4월 7일

이제 점점 성주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구원 미션의 끝에 다다랐을 때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순례를 떠납니다. 그 떠남은 세상적으로 죽음을 의미하지만, 하느님의 뜻에는 부활,즉 영원한 평화의 삶을 의미합니다. 세상 적으로는 실패를 말하겠지만, 하느님의 뜻에는 승리를 말합니다.

그 마지막 순례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승리의 힘은 바로 회개, 용서, 그리고 화해입니다. 이 힘의 바탕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 겸손은 자기비하가 아닌 스스로를 잘 알고 온전히 받아들여서 부족함을 채울수 있습니다. 그 부족함을 그리스도께 귀의함으로서  온전한 채움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과 이번 주일의 복음은 회개와 용서의 복음입니다.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따듯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일의 루카 복음 (15: 11-32), “돌아온 탕자의 회개”와 이를 “조건 없이 용서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오아시스 같은 삶의 희망을 갖게 해줍니다. 우리가 믿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또한 오늘의 요한복음,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8: 1-11) 또한 아름다운 용서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용서 주체는 아버지 하느님이 아닌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와 마을 사람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간음한 여인”을 다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 여인을 용서한 것이 아니라 ‘단죄’하지 못하고 돌아간 것 입니다. 그들도 돌을 던질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판하고 단죄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결국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 루카 복음 사가는 그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들려주려 썼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탕자’를 용서해주는 아버지의 사랑이 참으로 따듯하고 아름다운 감동의 이야기였다면 ‘큰 아들’의 이야기는 ‘돌아온탕자’의 용서를 더욱 강력하게 설득합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돌아온 탕자’는 그동안 하느님을 모르고 세상적으로 살아온 이방인들이고 큰아들은 하느님과 함께 있으며 그 은총 속에 살면서도 하느님의고마움을 모르고 교만과 아집의 배타적인 유대인을 꼬집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도 보여지는 흔한 모습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없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 그래서 언제나 비교하고 질투하고 눈치 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끝은 언제나분노와 미움입니다. 파괴적인 삶이며 스스로 상처받는 삶입니다.

그 큰아들의 치유 방법을 ‘아버지’가 잘 알려줍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천천히 묵상하듯 바라보면 없는 것도 많지만 가진 것도 참 많습니다. 없는 것에 아쉬워하고 그래서 질투하고 미워하고 한탄하는 삶을 살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진 것들을 바라보면 참 괜찮은 것들입니다. 참 고마운데 그 고마움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마워하지 못하고 살아온 삶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버지가 안 해준 것이 섭섭해 아무것도 없는 동생에게 질투를 한 큰아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가 느끼는 질투와 미움의 마음이 아닌가 합니다.

결국 아버지의 고백,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32) 이 돌아온 ‘나쁜’ 아들을 반가이 맞아주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변을 돌아보며 가족과 이웃을 바라보는 마음일 것입니다.

이에 반해 오늘의 복음은 같은 ‘용서’의 이야기이면서 다른 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사가 역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신앙을 경멸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회개를 강하게 요구하며 또 그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오늘의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바로 그 회개를 말합니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오늘 용서의 주체는 지난 주일과 다르게 ‘사랑’이 아니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회개’입니다. 예수님은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회개란 자기 반성에서 시작합니다. 자기 반성은 바로 역지사지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바로 ‘누구나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게 되고 따라서 상대방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돌을 던지지 못하고 돌아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도 했지만 간음죄로 잡혀 온 여인을 단죄할 명분을 상실한 또 하나의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참조 8: 4)

분명히 현장에서 붙잡혔는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여인만 잡아끌고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상대방 남자는 데려오지 않고 여인만 데려온 것입니다. 상대방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난 2015년 11월에 흥미로운 기사가 났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간음하다 잡힌 커플이 있었는데 여인은 오늘의 복음처럼 돌을 던져 죽이는 사형을 언도하고 남자는 채찍질 100대를 맞는 것으로 판결이 났습니다.

현대의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그 지역의 전통법이라 해도 하느님의 법은 전혀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자의 목숨이 남자의 목숨보다 하찮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에여인의 유혹으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에도 여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이를 낳을 때 산고의 벌을 주셨지만 죽음의 벌은 두 사람에게 똑같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타인이해코지하는 것은 막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런 근거를 대며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8:5)

실제로 모세의 율법에 간음에 대해 강경합니다. 십계명에도 ‘간음하지 말라.’ 라고 분명히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의 20장 10절과 신명기의 22장 22절에 보면 모세는 간음을 저지른 사람은 사형에 처하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간음한 남자와 여자 모두 사형시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복음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8: 7) 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그불공평의 부조리는 이미 내재된 문제인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그들의 숨기고 싶은 죄였습니다.

세상적인 사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더 가혹한 것이 현실입니다. 없다는 이유로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의 죄를 더 가혹하고 강경하게 단죄합니다. 힘 있는 이들의 죄에 대해서는 욕을 하면서도 결국은 관대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를 말씀하시며 오히려 힘없는 가난한 이를 더 보살피는 사랑을 역설하십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밤낮으로 단식하시고 유혹을 물리치고 내려오셔서 회당에 들려 첫 성경을 읽을 때 이사야서의 다음 부분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 18)

결국 예수님의 세상 구원의 열쇠는 사랑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 구원의 시작이요 끝인 것입니다. 이는 회개, 용서와 화해로 표현됩니다. 즉 자신 사랑은회개에서 시작하고, 이웃 사랑은 바로 역지사지를 통한 관용과 자비로 이루어지며, 이 모든 것을 일상에서 행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궁극의 구원이며 행복의 길인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어느 봄날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순례를 떠난 이유입니다. 그 봄 날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고있습니다. “아직 춥다고 바스락거리며 모여드는 낙엽 비집고 빼꼼히 내미는 힘센 봄” (“제비꽃” 이시향)이 우리 곁으로 다가옵니다.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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