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4주일

2020년 12월 20일

오실 분이 지체 없이 오시리라. 그분은 우리 구세주, 이제는 우리 땅에 두려움이 없으리라.
(히브 10,37 참조)
오늘은 대림 시기 12월 19일로 크리스마스가 6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얼굴을 날카롭게 스치지만 화창한 햇살이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고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겨울 바람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마음이 바빠집니다.

내일 주일( 12월 20일) 퀸즈 성당 교육관에서 뉴욕시에서 시행하는 코비드 테스트가 무료로 있습니다. 오전 9:30분부터 저녁 5:30까지 시행합니다.

원하는 분은 누구나 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에 많은 분들이 이 테스트를 받기를  바랍니다. 증상이 없더라도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접하기에 이런 검사가 우리에게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거나 마음의 평화를 줍니다. 괜히 혼자 걱정하고 고민하기 보다 이런 기회에 검사를 받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루카 복음의 시작 부분으로 세례자 요한의 탄생 비화를 알려줍니다. 하느님의 사자로서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출현을 준비하고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도 평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 비화와 상황이 반대인 점도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혼전의 처녀 마리아에 천사가 나타나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한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마리아의 사촌인  엘리자벳이 아이가 없이 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천사가 나타나 잉태 소식을 전합니다.

마리아는 아직 아기를 갖을 수 없는 어린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엘리자벳은 아이를 갖고 싶은 데 아이를 못낳는 여인이었고 또 둘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엘리자벳과 즈카르야는 둘다 하느님 앞에서 의롭고 모든 계명과 규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제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아이가 없어서 언제나 하느님께 간청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자인 요한을 보낸 것입니다.

즈카르야가 성전의 성소에 들어가 사제로서 분향을 할 때 천사가 나타나 엘리자벳의 임신 소식을 전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루카 1: 13)

그런데 이 기쁜 임신 소식을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전했을 때, 즈카르야는 이렇게 답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1: 18) 이에 천사 가브리엘은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에 벙어리가 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구원을 시작하시는 시점에 그 구원의 봉사자를 뽑을 때 사회적 지위가 높고 유명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의인이며 신앙심이 깊은 사람을 뽑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구원 시작은 미미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출발점이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즉 귀족이나 기득권이 아닌 병들고 소외 받고 어려운 하층민으로부터 구원이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그러고 이 구원의 불길은 점점 높게 넓게 퍼져간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늙은 부부에게 어렵게 태어나 귀하게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광야에 나아가 하느님의 사자로서 구세주께서 오심을 세상에 알리며 세례로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시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셨을 때 세상에 그 분이 예수님임을 알려줍니다.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이렇게 기쁨이 되는 것은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만큼 그 기쁨은 큰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자벳과 즈카르야의 경우는 간절함의 기다림에 지쳐 포기한 상태에 아기를 임신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에 의심을 한 것입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자벳이 절실히 원한 아기를 못낳아도 그들은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아이가 없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받는 치욕을 감내했습니다. 온전히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갔습니다.

아이를 포기 하였을 때 하느님은 그들에게 아이를 보내셨습니다. 이에 즈카르야가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쁨은 기대하지 못한 상황에서 오기도 합니다.

살다 보면 어떤 절실함에 매달리다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포기할 때 또 다른 문이 열립니다. 그 문이 원래 원했던 문이던 아니면 새로운 문이던 간에 새로운 시작의 기회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을 실패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포기’를 나약함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포기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미리 포기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 도전하고 노력하여 성취하도록 해야하지만 그래도 않되면 ‘포기’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입니다.

‘진인사후 대천명’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최선을 다했을 때 그 결과는 하늘에 맞기는 것은 여러모로 건강한 선택입니다. 뜻이 이루어졌을 때의 성취감의 행복을 극대화 할 수있고, 만약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분노하고 좌절하지 않고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와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할 때 많은 청원을 합니다. 그리고 그 청원에 따라 최선을 다해 노력하기도 하고 그저 기다리기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흘리며 하신 기도처럼 청원 기도의 끝에 이렇게 한마디 더하면 어떨까요? “…아버지, 저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쉽지 않은 기도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청원기도 끝에 아버지의 뜻에 맡기는 기도가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리라 믿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부모 엘리자벳과 즈카르야에게 전해진 뜻하지 않은 기쁜 소식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우리 모두에게 전해지길 기도드립니다.

시편 71(70),3-4ㄱㄷ.5-6ㄱㄴ.16-17(◎ 8 참조)
◎ 저의 입은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 영광을 찬미하나이다.
○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할 산성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보루시옵니다. 저의 하느님, 악인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
○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 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 ◎
○ 저는 주 하느님의 위업에 둘러싸여, 오로지 당신 의로움만을 기리오리다. 하느님, 당신은 저를 어릴 때부터 가르치셨고, 저는 이제껏 당신의 기적을 전하여 왔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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