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2019년 7월 7일

칠월의 여름은 망중한의 여유가 어울릴 것 같은데 오늘 연중 14주일의 복음(루카 10: 1-12, 17-20)에서 예수님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며 한탄하십니다. 그리고 72명의 제자들에게 수확할 밭의 주인에게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왠지 제자들은 서둘러 마을로 가서 더 많은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알려야 함을 알려줍니다. 세상적인 여유와 하늘나라의 여유는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리 여유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레아에서의 복음 선포를 마치고 “하늘로 오르실 때가 차자“ (9:51)당신의 미션의 마무리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제자들과 순례를 하면서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순례를 떠나시기 전에 당신의 죽음을  9장에서 두 번이나 예고하시었습니다. 그 죽음은 고통스러운 박해의 예고였으며 당신의 부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 아무도 그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조급해지셨는지도 모릅니다. 당신께서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오르실 때가 점점 가까워 오는데 제자들은 아직 하느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믿게 하려는 예수님의 애절한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 사랑의 깊이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천대 받는 사람들을 볼 때 “장이 끊어지듯이 아픈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치유를 해주셨다고 합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온전히 느끼는 사랑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베푸셨고 지금도 베푸시고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 몸이 허약해 자주 아팠던 때에 아주 말랐었습니다. 집에서 목욕을 시켜주던 어머니는 손과 등의 때를 밀다 보면 살집이 없어 살가죽이 접히면 제 등을 찰싹 치며 한숨과 함께 눈물을 보이십니다. 건강하지 못한 아들을 보며 가슴이 미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나는 괜스레 맞은 등짝이 아프고 서러워 울었던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자식이 크면서 그 사랑을 조금씩 이해해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그 사랑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그 사랑의 깊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자신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제자들을 보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물질적 편리함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소유의 두려움도 아닙니다. 제자들이 꼭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에게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루카 복음의 시작을 상기하면 어린 성모님께 찾아온 가브리엘 대천사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성모님께,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1: 37)라고 말합니다. 이에 성모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또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자 제자들은 그럼 누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겠느냐며 투덜거립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것 일지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 (루카 18: 25-27)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루카 복음에는 다른 복음과 달리 두 번이나 하느님의 무한한 능력을 강조합니다. 이는 루카 복음의 공동체의 힘은 바로 높은 데서 오시는 성령이심을 강조합니다. 루카 복음에는 어느 복음보다도 많은 16번의 성령이 나옵니다. 그리고 루카 복음의2권이라 말할 수 있는 사도행전에는 무려 53번이나 성령이란 말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 72 명의 제자들은 아무것도 갖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명한 대로 복음과 평화를 세상에 전하러 떠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입니다.

제자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좋아합니다. 자신들이 직접 기적을 행하고 치유를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기쁨은 마치 세상을 얻은 듯한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직 더 큰 힘이 그들에게 내릴 것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세상적 성공보다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더 크게 생각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사실 12 제자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엄청난 기적을 직접 목격하였고 오늘의 복음에서처럼 기적도 직접 행하였음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의 파스카 신비 후에 높은 곳에서 오신 성령이 제자들에게 내린 뒤에야 이해합니다.그리고 죽음을 불사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 온몸과 온 맘, 온 정신을 다 받칩니다.

우리의 신앙은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받고 닮으려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갖난 아이가 엄마 아빠의 말과 행동을 따라하며 배우듯이 우리도 아이처럼 예수님의 말과 행 동을 따라하며 닮아갑니다. 그리고 그 복을 하늘에 쌓아갑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인간적 논리와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기도”로 부터 시작합니다. 마더 데레사 성인께서 좋아하신 격언 중에 하나는 “우리의 기도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를 바꾸고,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를 통해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진리를 증거하십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20절에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 된 것을 기뻐하여라.” 고 말씀하신 다음 21 절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기도는 세상적 지혜와 슬기에 기뻐하기 보다는 아버지 앞에서 철부지가 될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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