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비유

2018년 3월 18일

오늘 사순 제5주일을 지내며 사순 재계, 즉 참회, 단식과 금육의 고행 그리고 선행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더 늦지 않게 남은 사순시기에 재계에 더 분발해야 하겠습니다. 재계는 고통을 위한 고통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재계이며 이는 바로 주님의 파스카 신비의 참여입니다. 문득 언젠가 들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유명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하느님을 향해 날아간다.

헤세가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고 묵상한 시구는 아닌가 할 정도로 오늘 복음인 “씨앗의 비유”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죽음은 필요 불가결한 삶의 진리임을 예수님은 씨앗을 비유해 가르쳐주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 24)

따라서 우리 삶의 고통은 바로 삶의 가치를 더 일깨워 주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각 개인의 경험이 다르듯이 그 경중이 다르지만 혼자 이겨나가는 극기의 훈련이기보다는 더불어 함께 극복하고 이겨나갈 때 가능하고 그 고통은 단순한 소멸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의 죽음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도 극명히 잘 나타나듯이 아무리 죽음이 부활의 과정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은 유혹은 바로 두려움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요한 12: 27)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이 고백은 예수님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솔직함을 드러내 비움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리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십니다.

“비움”은 바로 빈 무덤의 그것과 같이 “부활”의 표징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분명히 밀알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하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산란한 마음을 고백하십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죽움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십니다. 마치 공생활의 시작에 앞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 광야로 가시어 40일 밤낮으로 기도하며 받으신 유혹을 연상케 합니다.

배고픔의 고통과 성공의 욕망에서 벗어나신 예수님은 오늘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유혹을 받으십니다.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하고픈 유혹에 사로잡히십니다. 그래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절실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광야의 유혹을 믿음으로 극복하셨듯이 오늘도 당신의 믿음으로 이를 극복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27) 당신의 본분을 잊지 않으시고 본분으로 돌아가십니다. 모든 인간적인 유혹은 오히려 예수님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할 뿐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은 바로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삶을 보이시면서 또한 우리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게 승화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십니다. 그 승화의 비밀이 바로 “믿음”입니다.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도, 죄와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실패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도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우리를 믿음의 근간이 되고 결국 믿음은 바로 우리를 거룩하게 승화시키는 발판이 되고 나아가 영원한 삶으로의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또 하느님께 고백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28) 이에 아버지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28) 이에 예수님은 이 말씀을 바로 당신 자신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를 위한 말씀이라 하십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그것처럼 우리의 거룩한 변모입니다. 하느님의 모습과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가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파스카의 신비 즉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신비는 예수님 당신 혼자 비밀리에 이루어낸 신비가 아닙니다. 항상 그 믿는 이들 앞에 그 영욕을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영광과 오욕의 순간 혼자가 아니라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하십니다. 모든 기적을 행할 때, 거룩한 변모 때, 최후의 만찬 때에도,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도, 십자가 위에서 죽음에 직면한 때에도 항상 거기에 믿지 않는 이들과 믿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함께 더불어 고통과 죽음을 짊어지시고 이를 통해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와서 보아라.”(요한 1:39)라시며 우리를 당신의 세계로 초대하십니다.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가 이 땅에 오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예수님을 따라 그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순절은 바로 그 길을 적극적으로 경험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부활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밀알의 비유 말씀으로 사순재계의 의미와 주님의 파스카의 신비, 즉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묵상하며 헤르만 헤세의 “기도”라는 기도를 해봅니다.

헤르만 헤세

하느님이시여, 저를 절망케 해 주소서
당신에게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미혹의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온갖 모욕을 겪도록 하여 주시옵고
내가 스스로 지탱해 나감을 돕지 마시고
내가 발전하는 것도 돕지 마소서
그러나 나의 자아가 송두리째 부서지거든
그 때에는 나에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낳아 주셨다는 것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으려고 하나
나는 오직 당신의 품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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