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2024년 5월 5일

 5월 5일, 오늘은 한국에서 어린이날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전례력으로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를 보호하고자 제정한 생명 주일입니다. 비록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어린이날은 없더라도 우리는 어린이에게 느낄 수 있는 그 따뜻한 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부의 양극화, 지나친 사교육비, 치솟는 주택 물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 등으로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낳는 것을 피하고 지난 분기 한국의 합계 출산율은 0.6명대로 떨어졌습니다. 어린이날의 기쁨을 누려야 할 어린이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에 못내 아쉬운 마음을 담으며 한국에서 있었던 한 어린이와의 추억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작년에 한국에서 젊은 엄마 아빠들이 자녀에게 했던 질문이 유명해져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질문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야, ○○는 엄마가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거야?” 이런 질문을 들은 아이는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은 어느 정도 대처할 능력이 생겼다지만 바퀴벌레로 변한다는 것은 상상해 본 적도 없고, 바퀴벌레가 지저분하고 피하고 싶은 존재라서 멀리하고 싶은 것이 아이들의 솔직한 마음일 것인데, 그것이 또 엄마 아빠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멀리할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소 엉뚱하고 짓궂은 질문이지만 그렇게 아이들의 사랑을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봅니다.

  어느 날은 저도 이 질문을 써먹어 보고 싶다는 장난기가 생겼습니다. 저는 복사단을 담당하고 있었고 복사단 친구들은 복사를 서기 위해 성당에 왔다가 미사를 드리거나 어린이 미사 전후에 저의 사제관에서 놀다 가곤 하였습니다. 그때에도 한 몇 명과 사제관에서 놀다가 제가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네는 신부님이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러니까 느닷없이 한 친구가 대답합니다. “먹어 버릴 거예요.” 이게 무슨 의미인가 의아한 표정으로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바퀴벌레는 지저분하기도 하고 맛도 없잖아. 그걸 왜 먹어?” 그리고 나서 그 친구의 대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신부님이 바퀴벌레로 살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제 뱃속에서 따뜻하게 살게 해줄 거예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저로서는 마음이 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같은 대답을 어른이 했다고 하면 이렇게까지 감동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아이는 아이라서 거짓말할 줄 모르고 이런 순수한 아이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깨달았습니다. 어린이날에 담긴 의미, 어린이들의 사랑의 힘에 대해 간과하지 않기를 바라는 오늘 어린이 날입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니 저도 벌써 이 글을 쓰면서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친구란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친구는 친할 친(親), 옛 구(舊) 자의 합성어로서 글자 그대로는 가깝게 오래 지낸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가깝다는 것, 다른 하나는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복음 말씀을 하신 시간적인 배경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하시는 유언과 같은 말씀이니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실 것을 다 가르쳐주시고 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처음 만난 관계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과 제자들의 신뢰 관계를 전제로 하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인과 종의 관계가 친구의 관계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짚으십니다. 보통 종은 주인과 친밀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를 설명하는 루카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러한 맥락에서 종은 주인에게 충성스럽다고 말합니다. 말씀 그대로 종은 주인의 분부를 받은 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은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과 종의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친구와의 관계는 다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친구 사이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가까이 있고 싶고 오래 있고 싶은 그런 친밀함입니다. 친구와의 관계에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살펴볼 수 없었던 것이 드러납니다. 바로 “고마움”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서도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하고 주인은 그런 충실한 종에게마저도 고마움을 표현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구라고 하신 그 제안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겠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우리가 친구 관계라서 느낄 수 있는 고마움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친구에게 언제 고마움을 느끼나요? 그저 나에게 모든 것을 퍼주는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더 고마운 것은 나의 원 의를 알고 그것을 실천해 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친구의 관계란 무조건 많은 것을 주고받는 것보다도 친구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잘 알고 그것을 해주는 것이 진정한 친구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친구 관계라고 한다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많은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이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구로서 고마움을 느끼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하거나 뽑아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에 응답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 2독서에서의 말씀도 이해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하고자 했으면 하는 것들을 우리가 하는 것이 더 참된 사랑입니다. 내가 좋다고 하는 것을 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친구의 본래적 의미, 가까이 있고 싶고 오래 있어서 잘 아는 의미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분명 종으로서 주인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한 도리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구라고 하셨다는 것은 그 관계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 상호작용이라는 친밀함 속에는 고마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 고마움은 상대방이 나에게 무작정 많은 것을 해주는 데에서 드러나기보다 나를 잘 알고 내가 원하는 것을 실천해 주는 데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와 가까이 있어서, 오래 있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