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4년 6월 2일

오늘은 “예수 성심 성월”인 유월의 첫 주일을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체 성혈 대축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축일로 ‘학생 견진 성사 미사’가 오늘 오후 1시 30분에 제임스 마사 주교님께서 집전하십니다. 오늘 견진 성사를 받는 14명의 견진자를 위해 기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지지난 주 대축일은 50일간의 부활 시기를 ‘성령 강림 대축일’로 갈무리하고, 다음 주일은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며 성령 강림으로 드러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실체를 이해하는 주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표징인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사 대축일’을 지냅니다.

  이 세 축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교회를 통한 세상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는 축일입니다. 먼저 성령 강림은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보여주신 구원의 사랑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가 두려움 없이 세상에 나누어 줄 수 있게 보호하고 지혜의 힘을 주신 것입니다. 즉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언제나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면서 그들의 믿음이 약한 것에 책망하시고, 폭풍에 멈추라 명하시니 바람이 잔잔해졌습니다.

  성령은 바로 교회에 예수님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현존을 드러냅니다. 세상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며 예수님 말씀을 세상에 전하고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이들의 공동체 교회의 숨은 힘이며, 교회가 예수님 현존인 이유입니다.

  성령을 존재적 의미를 설명하는 축일이 바로 지난 주일 지낸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 대축일’입니다. 성령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한 격입니다. 구원의 역사 속에서 인류가 경험하는 하느님입니다.

  태초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바로 세상 창조자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완벽하였지만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만물을 다스릴 것을 명받은 인간은 교만의 유혹에 하느님 말씀을 거역하고 불안전한 세상으로 쫓겨나 죽을 운명을 자손들에게 물려줍니다.

  시간이 흐르고 때가 차자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아버지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 구원을 위해 보내십니다. 아드님은 세상 창조에 동참한 말씀이었고, 마리아를 통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마르코 복음의 시작처럼 세상 구원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임마뉴엘: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에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게 된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하느님을 예수님을 통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는 필립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요한 14: 9)

  세상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자를 경험하였습니다. 성자는 성부의 뜻을 온전히 따라서 세상을 위하여 수난과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성자 예수님은 아담과 이브가 말씀을 어겨 저지른 원죄를 씻어버리셨습니다. 이를 통해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죽음의 원죄에서 해방시키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사람이 되신 성자 예수님은 온 세상을 위해 희생의 사랑으로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아버지께 순종의 영광을 드리고 사흗날에 부활하셨습니다. 믿는 이에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간다는 구원의 신비를 증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승천하시어 세상에 보호자인 진리의 영, 즉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그렇게 제자들에게 보내주신 성령을 통하여 모든 믿는 이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을 받게 되고 나아가 구원 사업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은총이며 사명입니다. 교회는 성령을 받은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구원의 역사 속에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현존으로 경험합니다. 우리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 신경,’고 ‘니케아 신경’은 바로 이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아버지와 세상을 구원하신 아들과 교회를 통해 구원의 경륜을 이루는 성령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으나 볼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표징으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 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시어 당신의 몸과 피로 받아 모시도록 하였습니다. 성체 성사는 예수님의 현존을 드러냅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성체 성사 제정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마르코 14: 22-24)

  예수님은 성체 성사를 통하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또한 성체 성혈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의 몸이 되어 세상에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즉 교회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몸입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모든 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도록 전교해야 한다는 사명을 주지 시켜줍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실체인 성체 성혈을 받아 모실 때 우리는 ‘아멘!’하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즉 성령으로 축성된 빵과 포도주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고백이고, 나아가 이를 받아 모심으로써 자기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지체가 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 성혈을 받아 모시는 우리는 거룩한 성체를 모시는 감실이고, 예수님의 거룩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원을 존중해야 합니다. 감실 앞에서 경외와 흠숭의 예를 표하듯……성체를 모신 공동체 형제를 존중해야 합니다. 상호 존중은 하느님 사랑의 기초입니다.

  교회의 사랑은 세상의 잣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잣대로 나뉘어져야 합니다. 세상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랑입니다. 교회는 소외되고 가난한 이를 먼저 챙겨주고 배려해 주는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주는 계명이다.”

  오늘 14명의 주일학교 9학년 학생들이 견진 성사를 받습니다. 견진 성사는 바로 세례 때 받은 성령께서 굳건하게 하는 성사이며, 어른으로서 삶을 성령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견진성사 때 주교님께서 크리즘 성유를 이마에 바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 특은의 날인을 받으십시오.” 이는 마치 계약 도장을 찍어서 계약을 확실하게 하듯이 성령의 날인을 찍어 성령께서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성사입니다.

  따라서 오늘 견진 성사를 받은 학생들이 성령을 통하여, 성령과 함께, 성령 안에서 성장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분께서 많은 성원과 기도를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그들의 삶을 바꿀 것입니다. 그들이 삶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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