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앤드류 신부입니다.

2020년 7월 19일

오늘은 연중 16주일 7월 19일입니다.

어느덧 7월 중순을 넘기고 있습니다. 우리 본당 식구 여러분은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아직도 문제는 세상에 넘치는 데 일상에 몇가지 불편한 점을 빼고는 정상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도, 사람들과 떨어져 이야기를 하는 것도, 길을 걷다가 맞은 편에서 사람이 오면 옆으로 피하는 것도…… 이런 것들이 모두 자연스러워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상, New Normal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상대방이 먼저 피해 주면, 고맙다고 인사합니다. 그러면 대부분 멋쩍은 미소로 답하고 지나갑니다. 식당 앞을 지나도 사람들이 길거리 테이블에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합니다. 거리를 다니다 보면 지난 4, 5월에 보았던 긴장감은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안전을 위해 사회 거리 두기 마스크 쓰기 등이 자연스러워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13장 24-43절의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마태오 복음은 다른 복음과 달리 ‘하느님 나라’ 대신 ‘하늘 나라’를 자주 씁니다. 마태오 복음에 ‘하늘 나라’는 51번이 나오는데 반해 ‘하느님 나라’는 4번 나옵니다.

  이는 마태오 복음의 주 독자가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신앙적 전통은 ‘하느님’을 입에 함부로 담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느님’이 나오면 ‘주님’으로 바꾸어 읽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 대신에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주로 씁니다.

  지난주일 복음처럼 오늘 말씀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가 아니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고 마태오 복음 사가는 설명합니다. (참조 13: 34)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설명하십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3: 13)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말을 들으려 마음을 열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 이해도가 달라집니다. 마음을 열었다는 것은 상대방의 의도를 이해하려는 의지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잣대로 상대방의 말을 평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바로 후자의 경우입니다. 자신들의 전통과 율법 지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예단하고 비판합니다. 자신의 아집과 고집에 하느님을 고정시킵니다. 결국 그 말씀을 취사선택하고 자신의 율법적 지식과 전통 안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비유’의 장점을 그 비유의 의도를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비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화자가 설명을 하면 하나의 주제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유의 이야기는 오래 기억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하늘 나라’ 설명의 비유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첫 번째 비유는 세상의 부조리가 존재하는 이유를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농부가 애써 가꾼 밀밭에 누군가가 가라지 씨앗을 뿌려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지만 농부는 가라지를 뽑지 않습니다. 가라지를 뽑다 밀을 함께 뽑을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추수 때 일꾼들을 시켜 가라지를 가려 뽑고 묶어 태워 버리면 된다고 설명하십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주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세상에 악의 존재를 방관하시고 계신가? 하느님은 악을 물리칠 수 없으신 것인가?

  오늘 ‘하늘 나라’ 비유의 이야기는 위의 두 질문을 명쾌하게 설명하며 해답을 줍니다. 바로 집주인의 말에서 드러납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13: 29-30)

  세상의 결정에서 흔히 듣는 말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자주 정당화됩니다. 실제로 많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결정입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다수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가 스스로 다수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정당화되고 그 희생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수가 소수를 그렇게 유도하고 정당화시키는 경우를 많이 목격합니다.

  세계 2차대전 말기 일본의 군국주의 세뇌로 젊은이들을 ‘가미카제’라는 이름의 자살 특공대를 만들어 죽음으로 몰고 간 사실이 바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시켰던 경우입니다.

  진정한 다수를 위한 소수 희생의 가장 절정은 바로 예수님의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혼자 수난을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못에 박혀 돌아가십니다. 이 희생은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지극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의 희생도 달갑지 않습니다. 마치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선 목자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 한 마리를 찾고 기뻐하는 목자가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늘 나라’는 아무도 소외되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는 빈부의 차이로 차별되지 않습니다. 남녀노소의 차이로 차별받거나 소외되지 않습니다. 생각의 차이로 소외되지 않습니다. 사회적 지위로 소외되거나 차별받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토록 아름다운 ‘하늘 나라’로 이끌 주십니다. 그러니 당신의 말을 곡해하고 비판하며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으로 부르시어 당신의 나라로 초대하십니다.

  지난 3월 뉴욕에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며 많은 노인들이 확진되어 죽어갈 때, 워싱턴의 어느 정치인이 ‘독감 같은 바이러스에 약한 사람들의 생명보다 경제를 우선으로 해야한다.”라는 식으로 노인들의 생명 가치를 폄훼하자 뉴욕 지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어머니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당신의 어머니도 소모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돈으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가라지를 뽑으려는 종들에게 집주인은 말합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이 말씀은 또한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 설명해줍니다. 하느님은 악의 존재를 인정해서 가만 놔두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다칠까 봐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뿌듯한 마음으로 희망찬 한 주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서로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쓰기로 조심은 하되 긴장하고 두려워하며 경계하지 않고 훈훈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로 이웃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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