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or's Desk

2018년 9월 2일

전통적으로 지난 5월 말 메모리얼 데이 (Memorial Day)로 시작된 여름의 끝인 구월의 첫날 노동절, 즉 Labor Day 주말입니다. 노동절은 19세기 말 노동운동이 태동하며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노동조합을결성하며 노동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만들어진 기념일로 1884년 의회 통과하여 공식 공휴일이 되었습니다.

노동절은 노동자를 위한 날입니다. 노동자는 피고용인을 말합니다.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대가를 받고 제공하는 피고용인을 말합니다. 노동자의 권위가 고용주에 의해 혹사당하던 산업혁명의 시대에 스스로의 권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동조합을 위시로 노동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를 일환으로 노동절이 제정된 것입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는 소외 받는 사람이 없는 사회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용서와 화해의 사회로 말씀하셨고, 교회는 이 말씀의 가치관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기도 공동체입니다.

이번 주일 많은 가족이 마지막 여름을 즐기기 위해 휴가를 떠나고, 멀리 가지 않아도 가족끼리 또는 이웃끼리모여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통해 위로받고 위로하며 가슴 흐뭇한 주말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5주일 동안 들은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을 들었고 마지막 시몬 베드로는 생명의 빵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생명의 빵인 예수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모두그 말씀을 믿고 따르며 나아가 이웃에게 전하는 선교의 의무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다시 마르코 복음으로 돌아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이신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 바리사이들을 꾸짖는 이야기입니다. (참조 마르코 7:8)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은 계명, 법이라고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따라서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를 탈출해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 중에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10계명을 모세를 통해 내리십니다. 그 십계명은 세월이 지나며 더 많은 율법 조항으로 발전하고 급기야 율법은 의식주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제약을 합니다. 일상의 소소한 율법도 어기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는 노력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자연스럽게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율법을 지키는 것에 최선을 다한 교파가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에게 더 가혹했습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일로만 여기고 감히 생각하지 못하여 그 무게는 더욱 가중되어가는 삶의 멍에가 되어버리는 부조리에 빠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십계명으로 시작된 하느님의 계명이 613개 조항으로 늘어납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 당연히 법조항은 다양해지면서 그 수가 늘어납니다. 해야만 하는 조항과 해서는 안 되는 조항으로 이루진 법은 모세 5경을 중심으로 발전됩니다.

법은 평등한 질서를 통한 화합이며 사회의 조화의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의 실행은 공정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탈출기에는 법의 공정성을 이렇게나옵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 가난한 이의 권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거짓 고소를 멀리해야 한다.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방인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탈출기 23: 6-9)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대체하고 화합과 조화보다는 판단의근간으로 삼아 분열이 조장됩니다. 또한 그 법의 해석이 아전인수식이어서 형평성에도 어긋나게 되는 현상이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이렇게 꾸짖습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보이기 위한 것이다.” (마태오 23:4-5)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정녕 내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 28-30) 하느님께서 법을 모세에게 주신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 완고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법은 사실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법은 사랑이  그 중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용서로 표현되고 화해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며 바리사이들을 이렇게 꾸짖은 것입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마르코 7: 6)

법을 지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나 그 법의 기본 의미를 잊고 법을 위한 법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멍에가 된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 교회의 법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Slaus animarum suprema lex.” 영혼들의 구원이 최상의 법이다.”

구원의 첩경은 역시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고, 그럼에도 인간적인 나약함에 저지른 잘못을 회개와용서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서 구원이 완성됩니다. 이 것이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말씀하시는 것이고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 이룩한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의 잘 못을 보기보다 잘 하는 것을 보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고, 자신을 냉철히 바라보며 반성의 시간을 갖는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것이 바로 하느님의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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