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or’s Desk

2019년 11월 3일

오늘 연중31주일의 복음은 루카 복음의 19장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어느덧 전례력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달을 맞이하여 3주 후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끝으로 올해를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또 한 해를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다리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갈릴레아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순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갈릴레아 지방에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신 예수님은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의 순례를 결심합니다.

이 순례는 당신을 아버지 하느님께 현양할 때가 되어 마지막 순례길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전교 순례를 떠나십니다. 이 여정의 첫 번째 지방이 사마리아 지역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유대 사람들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불결한 지역이라 여겨 갈릴레아와 유대의 중간에 위하지만 유대 사람들은 요르단강 동쪽으로 돌아서 왕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지역을 관통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들도 결국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와 갈릴레아와 사마리아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구원 대상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잊고 서로 갈라져 반목하고 미워하며 헐뜯으며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께는 안타깝고 불쌍한 현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짖고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것은 바로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이며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수를 통하여 배우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율법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바리사이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법을 어기면서 남들이 어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신앙생활 즉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자신은 용서하면서 남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위선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은 바로 회개와 용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지난 주일의 복음의 현실적 변화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일 복음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방법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었습니다. 시장에서 드러내며 기도하는 교만한 바리사이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도 변하지 못함에 고개 숙여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8: 13).”라며 기도하는 세리의 이야기에서 오히려 회개한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고, 이 일이 이루어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인 예리코에서 일어난 일을 입니다.

죄를 뉘우치는 죄인 세리가 의롭게 되리라는 비유의 이야기는 오늘 예리코에서 세관장인 자케오가 어떻게 회개하고 그의 기적 같은 변화를 들려줍니다. 결국 잘못한 이를 미워하고 단죄하는 것보다 용서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회개하고 변화하는 죄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선 예리코의 공공의 적인 자케오는 키가 작은 사람입니다. 아마도 난쟁이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릴 적부터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자랐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욱 노력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관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으로부터 받은 모욕과 무시에 대한 복수였을 것입니다.

세관장은 세리들을 거느리는 대표자로 로마시대에 식민지의 세금은 직접 거두지 않고 용역을 주거나 대행권을 일임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세관장은 바로 로마로부터 위임받은 세금징수 용역인 셈입니다. 그들은 대개 고시된 세금보다 더 많이 받아 자신이 착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시민들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고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그런 세관장이 오늘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까지 올라가는 열성을 보여줍니다. 마치 지난 주일 복음의 하느님께 회개하여 자신을 낮춤으로서 의롭게 높아진 세리를 연상케 합니다. 이에 마음이 움직인 예수님은 당신을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초대합니다.

자케오에게 자신의 잘못을 훈계하고 힐책하면서 회개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닫힌 마음을 열고 반성하고 회개하는 용기를 예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크고 작은 죄를 짖고 실수를 하면서 배우고 성장합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려 안간힘을 쓰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남들에게 그 죄를 전가 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장은 자신의 죄로부터 자기 합리화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직면하며 자기를 반성하고 용기를 내어 회개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케오의 집에서 머무르시겠다고 하시자 군중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서 묵어가는군.” 하고 투덜거렸습니다.(19: 7) 바로 이 전에 예수님께서 예리코로  들오시면서 첫번째 기적은 예수님께 ‘다윗의 아들’이라 칭하며 자비를 구한 눈먼 이를 고쳐주시는 자비였습니다. 이때 “군중도 모두 그 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습니다. (참조 18: 35-43)

이렇게 군중들은 하느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려 하지않고 자신의 기준과 감정에 치우쳐 자신 맘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얕은 군중심리에 휩싸여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모순에 빠져버립니다.

이때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기적은 일어납니다. 자케오는 자신을 품어주는 예수님께 감화되어 회개합니다. 그 회개는 단순히 영적인 회개 뿐만 아니라 물적으로도 자신이 횡령한 재물을 주민들에게 네 배로 돌려주고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행동의 회개를 한 것입니다.

가장 욕을 먹던 죄인이 이제 선행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그 죄를 지적하고 꾸짖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회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휘고 꺾인 못은 망치로 바로 잡을 수 있지만 삐뚤어지고 닫힌 마음은 질책으로 바로 잡히지 않습니다. 이웃의 따듯한 자비에 의해서만 그 마음이 바르고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자케오와의 관계에서 그 자비를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관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투덜거린 군중에게 제대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왜 자케오를 따듯한 마음으로 품어주어 회개 시켜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바로 자케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에게 축복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루카 복음의 초 성모님이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고 사촌인 엘리자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자벳의 노래에 대한 답으로 노래를 부르시는데 그 것이 바로 ‘마그니핏캇’입니다. 이 노래의 끝부분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미치리로다.” (1: 55) 그리고 72절에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약속을 기억하셨도다. 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다짐하신 맹세이니……”

예수님은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0) 그리고 그 구원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믿는 이들에게 일어남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루카 1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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