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2020년 9월 6일

오늘은 연중 제23주일 9월 6일 노동절 (Labor Day) 주말입니다. 어느새 휴가철인 여름의 끝을 맞이합니다. 더위는 이미 많이 수그러졌고 섣부른 나무는 어느새 잎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마켓에는 햇옥수수가 수북이 싸였습니다.

   여기저기서 가을이 다가오는 소식을 전합니다. 선선해진 날씨가 그렇고 태풍의 소식이 그렇고 나뭇잎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청명한 하늘이 그렇고 마켓의 햇사과와 옥수수가 그렇습니다.

   여름의 끝자락에 노동절 연휴를 맞아 많은 가족들과 이웃이 모여 바베큐를 즐기며 삶을 나누고 우정을 나누며 삶의 아름다움과 직업의 고마움을 느낍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또한 일꾼들을 감사할 수 있는 고용주의 마음 또한 중요합니다.

   특히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팬더믹으로 많은 비즈니스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고 고생하고 있습니다. 고용주나 피고용인들 모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단순히 힘든 시간을 넘어 생계를 걱정하고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며칠 전 뉴욕 타임스 뉴스에는 갑작스레 일자리를 잃어 음식을 나누어 주는 줄에 서서 음식을 배급을 받으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요즘은 고급 차를 타고 음식 배급을 받으러 오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음식 배급을 받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감사함이 앞선다고 합니다.

   지금은 아주 특이한 상황입니다. 아무도 준비하지 못한 고난의 시기입니다. 우리 일상은 불편을 넘어서 고통으로 변하고 아이들의 교육이나 비즈니스가 정체되어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자괴감을 들게 합니다.

   이 시기에 어떤 이는 호황을 누리기도 하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적어도 현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적어도 일자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드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불안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순히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함 뿐만 아니라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경제적 문제에 대한 불안함으로 가득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 존중하며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아주 작은 배려도 큰 고마움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현재 어려운 상황과 상관없는 듯 계절은 변합니다. 남쪽으로부터 몰려오는 9월의 허리케인 태풍은 예전처럼 계속 우리를 위협합니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이렇게 세상이 계절의 변화를 준비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생활의 변화를 준비할 때입니다. 긴 팔 셔츠를 꺼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 지지만 우리의 믿음으로 서로 도우며 견디고 이겨 나가면 곧 좋은 시간이 다가오리라 믿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18장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의 생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중심의 신앙입니다. 각 개인의 안위가 공동체를 통해서 확실해지고 함께 더불어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삶의 방식이지만 또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삶의 무게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함께 살아가는 데는 그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 질서를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공동체 질서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은 십계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사람들은 오랜 여정에 지쳐 하느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를 하며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팽배해지며 혼란스러울 때 하느님은 모세에게 열 개의 계명을 주십니다.

   이 십계명은 가장 기본적인 법으로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믿으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법이 이스라엘이 40년간의 광야를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이 기본법은 이스라엘에게 지금까지도 “쉬마”라는 이름으로 외우고 각 집의 문설주에 그 말씀이 적힌 쪽지를 붙여놓습니다.

   결국 공동체가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질서는 그 어느 법보다 강한 결속력이 있습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이 법은 예수님께서도 항상 강조하시는 법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공동체에서 사랑이 결여되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존중하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될 때의 상황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웃에게 불편을 주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또 어떤 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웃을 속이고 이용합니다.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도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이럴 때 오늘 복음은 단순히 단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일러서 스스로 회개하게 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하고 사죄하며 죄를 용서받으면, 그 사람은 새 삶을 살 수 있으니 모두에게 좋은 결과입니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항상 이상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그 극단적인 상황을 보여줍니다. 잘못을 한 사람에게 여러 번의 회개의 기회를 주지만 교회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으면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참고 마태오 18:15-17)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각 개인에 대한 가치를 존중하고 소중하게 여기지만 이런 개인이 모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공동체, 즉 교회에 용서와 단죄의 권한을 주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8:18)

   용서는 하느님의 사랑의 가장 극적인 표현입니다. 잘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자신의 편을 사랑하는 것도 쉽습니다. 악마들도 그런 사랑은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특히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깨닫지 못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용서는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숙제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신은 남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적은 없는가? 내가 상대에게 실수나 상처를 준 적은 없는가?

   그리고 그 용서의 대상의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상황을 이해하면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어 용서의 폭이 넓어집니다. 그 포용력이 상대방을 마음을 녹이고 자성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용서를 못 하면 우리는 과거에 갇히게 됩니다. 따라서 복수나 미움으로 가득 찬 가슴으로 힘든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를 울화병이라고 하고 화병이라고도 합니다. 하느님은 이에 복수나 미움은 당신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그 사람의 단죄를 맡기고 오늘을 살아가면 다시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18:19-20)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완벽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평화롭지는 않지만 가장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서로 용기를 북돋아 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함께 있기에 행복할 수 있고 고통을 이겨낼 수 있고 힘든 광야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팬더믹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이때 우리는 더욱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우리의 마음이 무뎌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오늘도 바람은 우리에게 가을이 다가온다고 속삭입니다. 사색의 계절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속삭여 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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