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2020년 1월 5일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냅니다. 원래 주님 공현 대축일은 1월 6일이지만 꼭 그 날에 지내지 않는 곳에서는 우리 교구에서와같이 가까운 주일에 축일을 지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의 예수님 탄생 비화의 일부로 동방으로부터 거룩한 분,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탄생하신 분을 알현하려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오고 거기에서 아기 예수님께 선물을 드리며 예수님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정체가 바로 유다인들의 왕이 되실 것이라는 예언이면서 또한 이방인들인 동방박사의 방문은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민족의 왕이 되실 것임을 미리 암시하기도 합니다. 동방 박사라고 번역된 이 이방인들은 당시의 지식인이며 지성인인 점성가들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말로 박사라 번역하는 것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들은 그리스어로 마고스 (Magos)라고 하며 하늘의 별을 보고 과학적 지식을 갖은 사제들로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라고도 합니다. 별자리 연구는 고대부터 아주 중요한 학문이었습니다. 단순히 예언의 매개로서 뿐만이 아니라 철학적 문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고 건축 분야나 고대 여행의 방향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도 했습니다. 따라서 천문학을 아는 사람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변방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왕의 탄생을 확인하기 위해 그 먼 여행을 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분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방인의 사제가 알현한 것은 이방 종교가 예수님 앞에 경배하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세상의 어떤 신들보다 하느님께서 위에 계시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은 또한 그렇게 위대하시고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마태오 복음은 잘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진 예수님의 말씀과 삶의 이야기입니다. 특히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일컫는 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의 집단촌의 주민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지어진 책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리스어로 쓰여졌지만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이기 때문에 복음의 기본적인 방향은 구약의 역사와 율법을 뼈대로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 그리고 삶을 조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된 다윗 왕의 자손 메시아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세가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것처럼 새로운 왕 예수님도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합니다.

그런데 메시아의 탄생에 갑자기 이방인의 등장은 뜬금없이 보이기도 합니다. 4 대 복음 중에 예수님의 탄생 비화를 알려주는 복음은 마태오와 루카 복음인데 두 복음의 관점이 달라 마치 두 개의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서로의 독자를 위해 각자의 중요한 점을 드러낸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요셉 성인을 중심으로 루카 복음은 마리아 성모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이 두 복음의 공통점은 두 가지 뿐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시고 구약의 예언대로 유다의 작은 고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유다의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역사적으로 다윗 왕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다윗 왕의 자손 중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고 마태오 복음은 이 점을 강조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다윗 왕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즉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마태오는 족보를 통해 강변합니다.

나아가 여담으로 베들레헴의 뜻은 빵을 굽는 집, 즉 빵집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면 제정하신 성찬 전례,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즉 ‘살아있는 빵’으로 우리의 영적 양식이 되신 것을 연상케 합니다.

루카 복음은 아기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고 증언하고 천사들의 알림으로 근처의 목동들이 찾아와 갓 태어난 메시아 아기 예수님을 알현합니다. 이에 반하여 마태오 복음은 마구간에 관한 이야기가 없이 동방에서 현자들이 어린 예수님을 알현하며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것을 예언합니다.

이 동방박사의 예수님 알현은 곧 헤로데 왕에 의해 정치적 사건이 되어버립니다. 미래의 유대 왕을 없애기 위해 당시 2살 이하의 베들레헴 어린이들을 학살합니다. 이에 어리 예수님은 요셉 성인에 이끌려 이집트로 피신을 갑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헤로데 왕이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방 박사들이 헤로데 왕에게 새로운 왕의 탄생을 알린 시기는 예수님이 태어난 지 적어도 1-2년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쓰여진 ‘아이’에 관한 단어도 갓난 아이를 뜻하는 ‘브레포스’가 아닌 어린아이를 나타내는 ‘파이디온’ 이란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둘 다 어린아이로 번역되었지만 영어에서는 child로 번역을 했습니다. 따라서 동방박사가 방문한 때 어린 예수님이 적어도 한두 살을 되었을 때였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나타나는 이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님의 정체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미래를 예견합니다. 인간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은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 비극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린 아이들의 학살이 그것이고 이집트로의 피신이 그러합니다.

이에 반해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더럽고 시끄러운 마구간에서의 탄생 이외에는 모든 부분이 문학적이며 평화롭고 영광스럽습니다. 누가 읽어도 루카 복음의 예수님 탄생은 구세주 탄생으로 흠이 없이 거룩한 이야기입니다.

이에 마태오 복음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탄생은 대단한 민폐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뿐만 아니라 요셉 성인의 입장을 대단히 곤란하게 만들었고 나아가 수많은 아이들이 학살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구원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구원에는 항상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구원은 쉽게 얻어지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힘든 여정을 통과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모세 때에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는 데는 많은 희생이 따랐습니다. 첫째는 과월절 (Pascha) 즉 이집트에서 탈출하던 그 밤에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들이 죽었습니다. 그때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맏아들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나아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를 40년 동안 헤맨 끝에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두 세대가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구원은 마술이나 요술처럼 어느 날 갑자기 꿈처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충분한 고통과 노력이 있은 다음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에는 모든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하느님은 보여주십니다. 한 방의 피도 헛되이 흘리지 않고 고통의 신음도 결국 아름다운 노래로 다시 태어남을 하느님은 보여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의 예수님의 탄생으로 비롯된 비극 또한 결국 하늘나라 완성의 초석이 되고 그 나라의 첫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의 파스카의 구원의 신비 또한 예수님께서 세상 구원의 수난과 고통을 혼자 온몸으로 받아들이시어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의 말씀을 세상 끝까지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의 마지막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28: 20)

구세주 예수님의 첫 공현이 바로 동방박사의 알현이었다면, 오늘 세상에 예수님을 드러내는 공현은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말과 행동은 바로 예수님을 이 세상의 구세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 모시는 성체는 바로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성찬 전례의 신비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그 빵을 먹고 그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몸이 이라는 사실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거룩하게 여기고 같은 빵을 나누어 먹은 우리는 서로를 거룩하게 여겨줘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공현은 우리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 따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오 28: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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