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제자 파견

2018년 7월 15일

오늘 연중 15 주일을 맞아 지난 주일 복음에 이어 마태오 복음의 6장 7절에서 13절 까지의
“12 제자 파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일은 예수님도 당신의 고향에서는 무시를
당하시어 그리 큰 기적을 행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다른 마을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복음과 회개를 선포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좀 더 설명을 하면 지지난 주일 연중 13주일에서는 5장의 마지막 이야기로 ‘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하고 죽은 소녀를 살려내는 기적’을 행한 다음 바로 고향에서 무시를 당한
이야기가 나와 좀 당황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죽은 이를 살리는 기적과 고향에서 무시
그리고 제자 파견…일련의 파격적 진행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여 가끔 인용하는 마더 데레사의 일화 중 하나는 뉴욕에서 기자들과 인터뷰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기자가 질문을 던집니다. “그 동안 전 세계를 다니시며 가난한 이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셨는데 스스로 ‘성공’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마더 데레사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성공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지난 3주간 일련의 롤러코스터 같은 예수님의 이야기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우리의
이야기인 듯하여 친근감이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부분은 바로
하느님의 일은 성공과 실패에 관한 이분법적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최선의 노력에 그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노력의 삶은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희망가득차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기도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삶의
모습에서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임을 예수님의 삶 속에서 발견합니다.
2주 전 열 두해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도 치유받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거대한 힘과 능력에 놀라고 여인의 절실한 ‘믿음’에 감동하고, 그러한 믿음으로
나의 고통도 치유 받을 수 있다는 희망에 들뜨게 됩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 복음의 이야기는 실망스럽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무시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
살아가면서 가까운 이가 내 편이 아닐 때 배신감에 오히려 더 서운합니다. 더 가까운 이가
이해해 주지 않을 때 더 아파합니다. 가까운 이가 무시할 때 더 절망적입니다. 더 나아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까운 이에게 언어적 폭력과 정신적 폭력 그리고 육체적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이 가깝기 때문에 더 잘 안다는 편견적
착각에 빠지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가깝기 때문에 서로 이해해
주기보다는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쉽게 판단하는 것은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주어 오해하고
반목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그리고 서로 반성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습니다. 성경적
표현으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 예수님은 그런 경우를 직접 당하셨습니다. 흔한 말로 ‘지가 무슨~’과 같은 무시를
당하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반응은 성경에도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반응은 복음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놀랐다”는 표현으로 단순화 되었지만 그 ‘놀람’에 포함된 예수님의 심경은 참으로
복잡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의 불신에 대항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에 저주를 내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마르코 6: 6) 라고 마르코 성인은 기록합니다.”
결국 “들을 귀가 있는 이는 들어라.” 마르코 4잘 9절의 말씀이 무책임한 말씀같이 들리지만
사실 이 말씀안에는 판단의 시각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근면한 복음 선포가 결국은 더 많은
이들을 회개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복음과 회개를
선포하도록 파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은 당신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는 모든 제자들의 의무임을 예수님은 알려주십니다. 예수님 구원의
신비는 바로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한 목소리로 세상이 회개하도록 근면하게 지속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한 사람이 듣고 내일 또 한 사람이 듣고 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선포합니다. 그리고 결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의 씨앗이
됩니다.
지난 주중에 따듯한 소식은 동굴에 갇혔던 소년 축구단 선수와 코치 모두가 구출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태국 온 나라가 노력을 다 했고 나아가 다른 나라
전문가들도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그들을 구출하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한사람의 힘으로
몇몇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관심과 많은 봉사자의 힘으로 이루어내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세상 모든 짐을 짊어지고 구하는
슈퍼맨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었을 때 가장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다른 것은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였기에
무소불위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의 힘을 갖으셨습니다.
그 믿음의 힘이 12 제자들 회개하게 하였고 그 제자들은 더 많은 제자들을, 그리고 제자의
제자를 변화시키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세상이 회개하도록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받은 미션은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믿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불신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믿는 대로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듣게 될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는 회개하고
새로운 희망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나아가 그의 회개의 믿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미국의 계몽시인 롱펠로우는 “화살과 노래”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I beathed a
song into the air,/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Long, long afterward,…the song, from
the beginning to end,/ I found again in the heart of a friend.”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허공에
노래를 불렀네/ 그 노래는 나도 모르는 어딘가에 떨어졌지만….아주 긴 세월이 흘러 그
노래의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것을 다시 찾았네.”
예수님은 성공을 위해 회개를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진리를 믿기 때문에 그리고 그
진리를 듣는 이들을 믿기 때문에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습니다. 그 진리는
이천 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있고 우리도 그 진리를 또 누군가에게
선포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이기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진리를 믿고 그 믿음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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