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용서

2019년 9월 15일

한가위 보름달이 밤하늘을 밝히어 훤한 밤 가족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미국에 살다 보면 한가위 추석을 잊고 지날 때가 많습니다. 한가위의 넉넉함을 잊고 살아가는 듯하여 슬프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 가슴이 한가위 보름달처럼 언제나 밝고, 한가위 추석처럼 넉넉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언제나 한가위 같기를 바랍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처럼……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15장의 이야기로 예수님의 사랑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회개와 용서에 관한 3개의 비유의 이야기들입니다. 각각의 비유의 이야기를 통해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회개와 용서의 중요성과 그 기쁨에 대해 역설하십니다.

 

첫째 비유는 마태오 복음에도 나오는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는 목동의 이야기입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러 아흔아홉의 양을 두고 떠나는 목동이 그 양을 찾아 기뻐하는 이야기입니다. 목동에게는 양들 한 마리 한 마리가 소중합니다. 한 마리라도 잃은 수없이 소중합니다. 이 간단한 비유에서 보통의 일반인들을 설득합니다. 하느님은 어느 한 사람도 잃을 수 없이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둘째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에서 동전 한 닢을 잃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로 루카 복음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과 달리 루카 복음의 예수님 비유 이야기는 남성 중심의 비유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들이 함께 들려주어 다양한 민중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세 번째 비유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위의 두 비유보다 더 우리 실상에 적합한 이야기입니다. 위의 두 이야기는 잃은 재산을 찾는 기쁨을 이야기하며 화해와 용서를 이야기한다면 세 번째 이야기는 재산과 사람을 잃고 찾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형의 이야기가 더해져 더 현실감이 살아있어 더 감동적입니다. 세 번째 비유도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루카 특유의 비유로 그 이야기 자체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단편 소설같이 잘 쓰여진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 비유를 비교하자면 처음 두 비유는 재산에 관한 비유입니다. 누구나 재산을 소중히 여기고 아낍니다. 그런 재산을 잃고 허탈해하는 마음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부자나 가난한 이나 모두 가진 것을 잃는 ‘상실감’ 큰 아픔입니다.  그렇기에 그 물건을 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예전에 미국으로 처음 왔을 때 가장 소중히 여기며 지갑 속에 고이 간직하고 언제나 들고 다니던 것은 바로 친구들의 주소였습니다. 당시에는 국제 전화를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 편지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타국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위로받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집안을 백방으로 찾아보았지만 못 찾았습니다. 자주 가던 곳과 지났던 길들을 나름 샅샅이 찾았는데도 못 찾았습니다. 그때의 상실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지갑 속에는 많지 않지만 돈도 들어있었고, 잃어버리면 불편한 운전 면허증도 있었지만, 몇 달간 상실감에 가슴 아파한 이유는 바로 친구들의 주소록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주소록을 잃어버리면서 친구들과 연락도 끊어 지었고 몇 년이 지난 후에  고국을 방문했을 때야 비로소 다시 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잃은 것을 다시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하느님께 우리 인간은 한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오늘의 비유를 들으면 단순히 재산을 잃은 상실감과 되찾은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감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한 사람도 버릴 수 없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외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단순한 전체적 의미의 인간 구원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구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구원과 개인의 구원이 모두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사회와 구성원에서 소외돼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되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사회 안에서 책임을 다하며 구성원과 화합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의 이야기 ‘돌아온 탕자’는 이 부분을 잘 드러냅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참 사랑하여 늘 함께 살기를 원했지만 둘째 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만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의 뜻을 존중하고 재산까지 그의 몫을 떼어주었습니다. 보통 아버지라면 대체로 둘째 아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요구를 들어준 성서 속의 아버지의 모습이 자못 비현실적인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지극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구속하는 사랑이 아니고,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유의 사랑입니다. 그 사람을 온전히 인정해주는 사랑입니다. 비록 그 결정이 미숙하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받아주고, 그 결정으로 고통을 받고 회개하면 또 용서하고 온전히 받아들여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용서’라는 단어를 들으면 바로 경직이 됩니다. 나에게 해를 끼친 그 사람이 생각나서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지만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용서하지 못하고 있음에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용서”라는 단어는 아마도 영원한 숙제 같습니다. 어렵지만 풀어야만 하는 삶의 무게 같습니다. 그런데 ‘용서’는 결국 나에게 해를 끼친 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용서’의 의미는 우리 속에 가지고 있는 분노와 복수심을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즉 우리 안에 갇혀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분노와 복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자유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비영리 의료 연구 병원인 매이요 클리닉 (Mayo Clinic)의 ‘용서’에 대한 연구자료에 의하면, 용서를 하게 되면 얻게 되는 장점은 1) 건강한 인간 관계, 2) 정신 건강 향상, 3) 불안과 스트레스와 분노가 적어지고, 4) 우울증이 줄어들고, 5) 면역력이 강화되며, 6) 자신감이 증대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 분노와 복수심에 갇히게 되면, 즉 용서하지 못하면 1) 자신의 분노와 고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풀어 인간 관계가 악화되고, 2)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게 되며, 3) 불안과 무기력하게 되고, 4) 삶의 의미나 목적을 잃게 되거나 신앙적 불신을 초래하기도 하며, 5) 다른 사람들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관계를 잃게 된다고 합니다.

 

용서는 단순히 신앙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의학적이며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용서에 관한 문제를 단순화시켜 문제를 피하려 합니다. 그 문제는 간단한 이분법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입니다. 잘했다 못 했다. 옳다 그르다. 해를 끼쳤다. 아니다. 우호적이다 적대적이다. 등등 흑백논리로 판단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옳은 행동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르면 처벌을 받고 소외시키는 형벌을 내립니다. 그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고 그 일로 그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대중은 그렇게 단순화된 관습이나 법으로 한 사람을 판단하고 소외시키면서 악인으로 낙인찍어버리고 잊어버립니다. 모든 무게는 낙인찍힌 개인에게 돌아갑니다. 회개의 기회도 주지 않습니다.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합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대중은 가해자를 처단하지만, 피해자도 또한 대중으로부터 죄인이 되고 소외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격리하고 소외시키는 것처럼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이 약자 또한 사회로부터 격리 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러한 사회적 본능에 반기를 듭니다. 세상적 논리에 반기를 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다고 강변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취사 선택적이지 않다고 세상을 설득합니다.  특히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잔치까지 열어줍니다. 이 대단한 사랑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형의 태도입니다. 형의 태도는 바로 당시의 바리사이의 태도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태도이며 우리 사회의 태도입니다. 따라서 그 태도로부터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큰 아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그 사랑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태도에 화가 난 큰아들을 이렇게 설득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1) 또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2)  과연 형은 자신의 분노를 풀고 아버지를 이해했을까요?  오늘의 복음을 들으면서 나는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자기 멋대로인 동생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행동에 분노하고 아파하며 복수를 꿈꿀 때,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했는지 마음을 열고 들어주지 못한 옹졸함을 반성할 용기가 있나 고민해봅니다.  용서는 그 사람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또 한 번 주는 작업입니다. 그 작업이 우리 가족 우리 이웃과의 관계를 더 화목하게 하고 우리 사회를 더 넉넉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한가위 달이 아직도 밝게 밤하늘을 비춥니다. 어두운 밤길을 걷는 이들이 빛이 되어줍니다. 우리 각자도 누구에겐가 밝은 달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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