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자비

2019년 9월 29일

지난 주중 아침 병자 성자를 위해 사제관을 나서서 병원으로 가는 가을바람을 가르며 가는 길이 참 좋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병자 성사를 주고 돌아오는 길은 주님의 선물을 받은 양 가슴 뿌듯함이 더욱 좋습니다. 병자 성사를 줄 때 환자와 가족이 갖는 위로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합니다. 그날도 병고의 고통 중에도 “신부님이 오시니 의사 선생님을 본 것 보다 더 마음이 편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을 들으며 하느님께 자연스럽게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종으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앙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미약한 신부의 존재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을 수 있는 신앙의 혜안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마태오 13: 16-17)

신앙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세상을 듣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귀로 세상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던지는 우리의 말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부조리가 당연한  세상이고, 웃음이 아니라 고토의 신음과 슬픔의 울음은 약한 자의 어리광에 불과하며,  우리의 말은 비판과 아집과 편견으로 가득 찬 독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6: 19-31)은 자비심 하나 없는 부자와 불쌍하기 짝이 없는 거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두 상극된 계급의 사람을 대비시키며 하느님의 자비를 설명합니다.

부자는 지난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보다는 재물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참조 루카 16: 13) 그래서 세상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는 이분법으로 바라봅니다. 가진 자는 현명한 사람이고 못 가진 자는 우둔한 사람입니다. 가진 자는 삶을 누릴 자격이 있는 자이고 못 갖은 사람은 비참한 삶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는 삶의 사랑이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비는 약한 자의 억지입니다. 자비는 없는 자를 더 약하게 만든다고 믿습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 공정한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기투성이로 병들어 약하고 가진 것이 없는 거지 라자로가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너무 가진 것이 없어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겨를도 여유도 없습니다. 단지 한 끼를 먹을 수만 있으면 행복한 존재일 뿐입니다.

한 끼 연명으로도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음 동냥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힘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죽어가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삶의 아이러니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던 부자도 결국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극명하게 다른 삶을 산 두 사람은 죽어서 그 운명이 달라집니다.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은 불쌍한 거지 라자로에게 자비를 베풀어 성조 아브라함의 곁에 둡니다. 그러나 부자는 하느님의 자비가 존재하지 않는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이승의 삶이 아무리 길어도 죽은 후의 저승의 삶에 비하면 일장춘몽 부질없이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이 짧은 삶을 우리는 아비규환으로 만들고 약육강식의 이기적인 삶이 현명한 삶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자비를 베풀지 않고 살던 사람은 저승에서 자비를 받지 못하고, 자비를 베풀거나 힘없는 사람은 저승에서 자비를 받는다는 교훈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결국 루카 복음의 예수님은 ‘사랑의 나눔’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 자비가 아주 클 필요도 없습니다. 아주 소박한 자비라도 그 힘은 위대합니다. 자비는 하느님을 믿는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세상을 예수님의 눈으로, 귀로 입으로 경험할 때 그 깊이 깊어집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자비는 아주 사소하고 소박한 배려에서 시작합니다. 그 배려는 삶의 기적의 씨앗입니다.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의 귀를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의 씨앗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고 난 후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부자가 불쌍한 라자로에게 빵 한 조각만이라도 던져주었더라면?

그럼 오늘 나는?

결국 자비는 영악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박함에서 나옵니다. 영악한 유다가 아니라 순박한 베드로의 눈물에서 자비는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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