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말씀

2019년 8월 4일

오늘 팔월의 첫 주일을 연중 18주일로 지냅니다. 한여름의 더위가 이제는 익숙하여 더위에 “그러려니~”하는 마음으로 해탈한 스님처럼 초연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다 문득 바람이라도불어오면 이 또한 “하느님의 은총”이려니 하는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무엇이든 익숙해지면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픔도 불편함도 익숙해지면 “그러려니” 합니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워집니다. 부조리조차도……살다 보면 많은 것들을 “그러려니” 하고 익숙해지거나 넘겨야 되는  상황이 많지만 그래도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허공에 맴도는 것을 방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허공에 메아리치고, 아무도 듣지 않는 것을 ‘그러려니’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지 않을 때 ‘그러려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무시당하고 세상의 논리가 판을 칠 때 ‘그러려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들려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말을따르면서 스스로를 잘 살고 있다고 자조합니다. 치열한 세상살이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정당화합니다.

세상살이의 정의는 당장의 내 이익을 위주로 판단됩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이 기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이 세상살이 정의에 벗어나면 그저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를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하고 ‘그러려니’ 합니다.

오늘 복음 (루카 12: 13-21)에 예수님은 이를 경계합니다. 세상적 정의는 복수이고 세상적  성공은 남보다 많이 갖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정의와 풍요는 모두 다 순간의 영광일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순간의 영화에 영원한 행복을 잃을 우를 범하지 않기를 경계합니다.

특히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풍요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일하여 더 많이 수확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남을 착취해서 이루는 풍요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복음에 나온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요청에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문 (루카 11: 2-4)의 중간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기도하는데 단순히 “양식”을 달라고 청원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이라고 그 양식의 양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일용할”은 하루에 먹을 만큼의 양을 말하는데 영어로는 “daily bread”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원전은 “에피오우시오스 (epiousios)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주님에 기도에만 쓰여진단어로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되지만 기본적으로 “충분히 요기할 만한 실체적 빵의 양”을 뜻합니다. 이를 의역하여 영어로는 “Daily” 또 우리말로는 “일용할”로 번역한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우리가 하느님께 청원하는 양식이 구걸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눈치 보면서 “양식 ‘좀’ 주세요.”라고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청원을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것은 ‘아버지 오늘 저희가 충분히 먹을 만큼 넉넉하게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또한 넉넉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원하는 자녀들의 삶은 당연히 굶주린 고행의 삶이 아니라 넉넉한 삶입니다. 예수님도 비유에서 말씀하십니다. 계란을 달라고 하는 자녀에게 전갈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냐고 말씀하십니다. 자녀에게는 어느 부모나 좋을 것을 주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넉넉한 사랑의 하느님이신 아버지는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이 충분히 넉넉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풍요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일상이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땀만 흘리는 것으로 모든 것이 풍요로와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모든 것을 잃기도 합니다. 이에 우리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이 두려움은 불신을 낳고 결국 서로를 협력의 협조자가 아니라 경쟁 상대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일상의 풍요에 대한 꿈은 단순히 오늘 일용할 충분한 양식이 아니라 남들보다 많이 갖는 것이 욕망의 굴레가 되어버립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음식, 더 많은 부를 향해 날아가는 불나방과 같아집니다.

오늘의 복음은 바로 이러한 일그러진 풍요에 대한 욕망에 대한 경고입니다. 진정한 풍요는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나눔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확 후에 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풍요를 즐기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쉼과 즐김이 나만의 것이면 그 기쁨은 축소됩니다. 그러나 함께 나누면 그 기쁨이 배가 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기쁨은 그 기쁨을 나눌수록 그 기쁨은 더 커집니다.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집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한 사람의 청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 형이 유산을 자신에게도 나누어 주라고 일러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거절을 하시면서부자의 비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부자는 많은 수확을 저장할 곳이 모자라 더 큰 곳간을 짓고 편안한 한 삶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 부자가 그 날밤에 죽는다면 다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고 나면 그 재산은 누구에게 갈것인가? 하고 반문하십니다.

누군가는 말할 것입니다. “자식들 차지지요.”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벌은 것인데요.”

많은 부모들에게 자식들은 든든한 곳간이 됩니다. 그 곳간을 가득히 채우려고 쉬지 않고 쓰지 않고 열심히 벌어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자녀들이 오늘 복음에서처럼 유산 싸움에 휘말리게됩니다.

아무도 나쁜 자식은 없습니다. 아무도 나쁜 형제들도 없습니다. 다만 욕심이라는 유혹에 빠지면 악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악에서구하소서.” (마태 6: 13)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동생이 부모님의 유산을 둘러싸고 형에 불만을 품은 것은 바로 부모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 푼이라도 더 쌓아 두려는 욕심이 자식들에게 대물림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님이 평소에 이웃과 나누며 자식을 가르치었다면 유산을 형제들끼리 서로 사이좋게 나누었을 것입니다.

나눈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나눌 때 아까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눔이 오히려 더 큰 풍요의 씨앗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나눌 것입니다.

농사꾼은 수확 때 가장 좋은 것을 다음 해 씨앗으로 남겨놓습니다. 그리고 봄이 오면 아낌없이 밭에 뿌립니다. 나눔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것을 이웃과 나눈다는 것은 바로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마음일 것입니다. 나눔은 더 큰 풍요의 씨앗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아들입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희생되시고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나누어 주십니다. 그 성체는 우리의 구원의 양식이 됩니다. 용서의 너그러운 마음을 줍니다. 유혹을 이길 힘을 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큰 욕심쟁이들입니다. 순간의 욕심보다는 영원한 생명에 욕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재물보다는 하늘의 재물에 욕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100년의 삶에 욕심이 아니라 영원한 삶에 욕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 욕심은 결국 죽더라도 잃지 않고 나누어 주어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는 하느님의 넉넉한 사랑입니다. 바로 우리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에 우리 본당도 지난 주일 11시 미사에 25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 하였습니다. 적지 않은 금액의 장학금을 필요한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본당 신자들의나눔의 실천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난 18넌 동안 이어온 장학사업은 우리 본당의 자랑이면서 오늘 복음에 맞는 나눔의 실천입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더 많은 나눔으로 더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고 일어서서 그들이 또 더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성장하기를 기도드립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근시안적인 욕심과 정의에 ‘그러려니’ 하며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나눔과 용서를 통해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또 기도합니다. “저희를 (세상적)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루카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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