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2019년 8월 25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여행하실 때에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어떤 대화가 오가던 중이 아니라, 갑자기 구원받을 사람은 적은지 묻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 속하는지 생각하며 걱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여행하시며 여러 고을과 마을에서 가르치시던 중에 이 사람이 질문을 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사람은 예루살렘 주민이거나 적어도 인근 고을의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는 갈릴레아나 사마리아 지방이 아닌 유다 지방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으로, 이스라엘의 북쪽 지방과는 달리 순수한 신앙과 혈통을 지닌 유다 지방 사람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의아한 모습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는 동족들이라도 사마리아인들과 같이 순수한 유다인의 혈통이 아닌 이들은 무시했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민족들에게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부심이 강한 유다인이 왜 자신의 구원을 걱정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원래 그가 지녔던 선민의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이 위치한 루카 복음 13장에서, 오늘 복음 전에,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본문에서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빌라도가 갈릴레아 사람들을 죽인 사건에 대해서 알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그들이 죄인인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멸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갈릴레아인들을 자기들보다 하등한 민족으로 여겼던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놀라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인 자기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과 똑같이 멸망하고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예수님께서 질문한 그 사람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선민사상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고, 그는 자신이 유다인인 것과 상관없이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주님께서 그들이 사는 거리에서 가르치셨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유다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는 구원이 유다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열려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고,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다고 하십니다. 유다인이 멸시하는 갈릴레아인이나 사마리아인, 그리고 하느님을 모르던 이방인이라도 유다인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어떤 좋은 은총을 받았더라도, 그것에 만족하고 그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구원은 주님께로부터 받는 한순간의 커다란 은총으로 완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간구하고, 자기 삶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동반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가운데, 항구히 완성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자녀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그들이 비록 죄에 빠진다 할지라도 자비로이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러한 주님의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자기편에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힘들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하느님께 봉헌되거나, 평신도로서 사도직을 수행하고 교회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해도, 유다인들이 선민사상을 지녔던 것처럼, 자만심에 빠져서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상태를 깨닫지 못하면, 꼴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 가는 순간까지 자기 모습을 성찰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일깨우면서 겸손하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좁은’이라는 의미 그대로, 몸을 구부리거나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곧 원래 자신의 모습에서 작아져야 지나갈 수 있는 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이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예수님께 예수님의 말씀을 청해 들읍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라고 명하시는 것을 실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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