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로운 삶

2019년 3월 3일

세상을 하얗게 덮은 흰 눈으로 시작한 춘삼월의 모습처럼 그렇게 우리의 마음과 세상이 깨끗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이 같은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게 더럽혀졌어도 그 더러움을 걷어내면 다시 깨끗해지리라는 희망이 우리가 다시 오늘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이라고 믿습니다.

100년 전 천안에서 시작된 나라를 잃고 자유를 잃은 민초들의 만세 소리가 희망의 함성이고 이 함성은 단지 분노의 함성이 아니라 각성의 함성이고 이 함성으로 민족의 독립운동은 구체적으로 각지에서 일어나고 1945년 독립의 초석이 되었고, 그 함성이 100년이 지난 지금 자랑스러운 나라와 긍지와 자유의 초석이란 생각이 들어 가슴이 뭉클합니다.

이천 년 전 이스라엘의 한 시골에서 시작되는 작은 함성은 오늘도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과 지표가 되어 우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합니다. 모두가 우습게 여기는 작은 목소리가 진정한 진리의 소리일 때 이는 커다란 함성이 되고 세상을 바꿉니다.

한낱 목수 아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함성이 되리라고 믿었던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 소리가 한 사람이 듣고, 두 사람이 듣고, 급기야 열두 사람이 듣고 따르면서 세상 끝까지 그 소리가 전해집니다. 그리고 세상이 함께 지르는 함성이 됩니다.

그 소리는 진리이 때문입니다. 그 진리의 소리가 바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을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은 새로운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비유의 말씀으로 설명을 하십니다.

비유의 말씀은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오 복음에 제자들이 왜 비유로만 설명하시냐고 질문을 합니다.예수님은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태오 13: 10-13)

비유의 말씀은 마치 이솝 우화와 같이 듣는 이의 마음을 열고, 듣는 이들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여 이해를 돕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시청각 교육 같습니다. 또한 비유의 말씀은 실제의 사례를 들어 설명함으로서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와 원래 의도한 말씀을 이해하고 믿는 데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오늘 연중 제8주일의 복음은 지난 두 주일 동안 들은 루카 복음의 6장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그 평지 교훈을 비유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합니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6장의 시작은 안식의 주인이 사람이라고 선언하면서 당신의 하느님의 법에 대한 권위를 선포하시고, 손이 오그라든 든 병자를 치유하심으로써 치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권위로 세상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그 시작의 발판으로 12 사도를 뽑으십니다. 이 사도들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며 궁극적으로 그 말씀을 세상에 전할 제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작은 소리가 모여 함성이 되게 하는 구원의 조력자이며 주체세력이 되는 사도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로 가십니다. 평지에서 사람들을 만납니다. 평지의 사람들은 농민이나 상인 같은 소시민이거나 소외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바로 두 주 전 복음인 “참 행복과 불행 선언”입니다. 지금 가난한 이와 갖은 이, 지금 슬퍼하는 이와 웃는 이, 지금 배고픈 이와 배부른 이, 진리를 말하여 박해받는 이와 당장의 이익이나 박해를 피해서 남이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이들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며 전자는 행복한 이들이며 후자는 불행하게 될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영성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의 구체적 삶의 기본적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은 바로 삶의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에 중립을 포기하면서 194년 의회 연설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4가지의 기본 자유를 선언합니다. 세계 모든 나라와 모든 인류는 미국인들이 영유하는 네 가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는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공포로부터의 자유.” 입니다.

이 자유는 바로 아주 크리스천적인 자유입니다. 바로 인간의 기본 행복 권리 추구에 대한 보장입니다.

루카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오늘날 커다란 함성으로 세상에 울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필요한 자유를 누리며 행복해지기 위해서 최소한으로 지켜야 하는 황금률이 있습니다. 그 황금률이 바로 지난 주일의 복음 (루카 6: 27-38)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대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36-38)

오늘의 복음은 이렇게 참 행복과 황금률을 비유로 말씀하심으로써 뭇 민초들의 이해를 돕습니다. 바로 역지사지의 교훈입니다.

42절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자기반성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문제를 밖에서 찾으려 합니다. 모든 문제를 남의 탓으로 먼저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가장 아는 이는 바로 자신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존 본능적으로 자기 합리화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이를 회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은 아니더라도 진실을 교묘하게 왜곡합니다. 그리고 남을 탓합니다. 또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가혹한 잣대로 남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면서 깎아 내립니다.

창세기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께 꾸중을 들을 때 아담은 이브를 이브는 뱀을 탓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상상해보면 피식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마치 만화의 한 장면같이 과장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우리가 참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느님처럼 자비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를 우리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이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겉만 그럴듯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집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위험한 집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삼월의 눈은 마치 한여름 팥빙수 같습니다. 하얗게 쌓인 얼음 가루가 숟가락질 몇 번에 곧 다 녹아버리듯이 삼월의 눈도 아침 해가 뜨자 바로 녹아버렸습니다. 아침의 새하얀 아름다움은 그저 내 전화기 사진으로만 남았습니다.

그래도 녹은 눈은 땅으로 스며들어 새봄의 싹을 트게 할 수분을 공급할 것입니다. 눈이 눈에서 사라져도 땅속에서 새 생명에 도움을 주듯이 하느님의 말씀도 그저 귓전만 울리는 빈 깡통과 같지 않고 우리 가슴으로 녹아들어 새로운 삶, 즉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삶을 사는 자양분이 되어 세상의 함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곧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자비로운 삶의 구체적 연습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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