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

2018년 9월 9일

대학시절에 쌀쌀한 어느 가을 단풍이 만연할 때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시외로 나가는 데 한 녀석이 답답하다고 하소연을 하며 팬을 틀어 달라고 합니다. 오래된 차라 팬은 고장 나 있었고 창문을 열자니 날씨가 쌀쌀해 그냥 참으라 핀잔을 주고 한참을 달리니, 다른 친구들도 이구동성으로 답답하다고 불평을 합니다. 창문을 여니 차갑지만 신선한 바람이 차 안을 가득 채워 추운 줄도 모르고 모두들 기쁨의 함성을 지릅니다. 그래서 창문을 열고 햇살에 여울지는 단풍과 함께 찬 바람을 맞으며 라디오의 노래를 따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답답하게 갇힌 것보다 추운 바람이 훨씬 신선하고 좋은 것처럼, 하고자 하는 데 할 수 없다는 것처럼 절실하게 답답한 것은 없습니다.즉 자유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하는 생각입니다. 미국이 아직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 있을 때 1775년 독립을 열망하는 애국지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패트릭 헨리 (Patrick Henr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Give liberty, or give me death!”)

유대인의 성조인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가산을 정리하여 동쪽으로 떠난 이래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유목민으로서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푸른 초원을 찾아 가축을 이끌고 떠도는 삶은 불편하면서도 또한 언제나 새로움에 도전하는 진취적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극심한 가뭄에 이집트로 가서 정착을 합니다. 그 정착 생활은 그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렇게 그들은 경제적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자유를 잃고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 모세를 보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모세는 노예로 전락한 당신이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자유를 줍니다. 오랜 노예 생활은 차갑지만 신선한 바람보다는 답답하더라도 따듯함에 편안함을 느끼듯 40년의 광야 생활 동안 투덜거립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도 그들은 여정을 멈추지 않았고 스스로 변해갔습니다. 그들의 자유는 불편함을 주었지만, 또한 서로 도우며 극복할 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시련은 더 단단해지기 위한 여정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법을 이해하고 따릅니다. 레위기의 19장은 예수님께서 말씀처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이삭까지 거두어서는 안 된다……이웃을 억눌러서는 안된다……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등등입니다.

결국 자유는 스스로 도우며 함께 더불어 행복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귀먹어서 말도 못 하는 한 소외된 죄인(?)을 용서하시고 치유하십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없고, 듣지 못하여 말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육체적 영적 구속에서 예수님은 풀어 주시고 자유롭게 듣고 말할 수 있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 굳게 닫혀 있어서 답답하여 열어달라고 부탁할 것이 있는지요? 아마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굳은 마음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이미 다 열려있는데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닫혔다고 한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모두 활짝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과 설레게 시원한 가을바람을 온몸으로 온 맘으로 맞으며 서로 바라보며 빙그레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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