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3주일

2021년 6월 27일

어린 시절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면, 아이들이 장래 희망으로 한 번쯤은 대통령을 꿈꾸듯이, 교황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황이 왕처럼 느껴져서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 같은데,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일컫는 교황의 직책에서 오는 직무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았더라면,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연중 제13주일이자 교황 주일을 맞아 강론을 준비하다가 예전에 개봉한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는 영화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새로 선출된 교황이 앞으로의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자, 결국은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나약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심정을 밝히며, 사임을 표명합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교황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실감하게 해 줍니다.

  교황은 여러 수식어가 붙습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로마 교구의 교구장, 세계 주교단의 단장,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 등입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닌데, 이름만 들어도 할 일이 태산 같은 교황에게, 무엇보다도 무거운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의 일을 대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일을 해낼 수 있겠지만, 나약한 인간 중 한 사람으로서 교황이 지니는 고뇌는 그 무게를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황에 선출된 분들 중에는, 그 직책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난 분들도 계십니다. 순명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약한 인간임을 속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 주일을 맞는 오늘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하시는 교황님을 위해 기도합시다.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인 이상 나약함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교황이든, 신자이든,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약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기 힘만으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그분께서 맡기신 일을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낫게 하러 가십니다. 야이로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딸을 치료할 수 없게 되자,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혈하는 여자를 고쳐주신 것을 보고, 이분이라면 반드시 딸을 낫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자기 집의 사람들이 와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딸을 낫게 하시기도 전에 딸이 죽었으니, 야이로의 마지막 희망이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딸을 살리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의 말은 굉장히 큰 유혹입니다. 예수님께 매달려야 하거늘, 딸이 죽었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은 보내드려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예수님께도 희망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에 휩싸인 야이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야 하고, 상황에 따른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생각들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더 무겁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정말 믿기만 하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두려움에 쌓인 생각조차 버리고 당신을 믿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만큼이나 무거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지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것을 지고 갈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믿음을 두는 것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정말 나약한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청하도록 합시다.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