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사랑

2019년 5월 19일

성모님의 달 오월과 함께 어머니 날을 빗속에서도 가슴 뿌듯하게 지냈습니다. “엄마”라는 단어가 갖는 힘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다 똑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에 비교하는 것도 우리가 그 사랑을 이해하기가 가장 쉽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오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묵상하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으로 시작되는 우리 인류의 서사시와도 같을 것입니다. 오늘의 요한  복음도 그 아름다운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전례적으로 공관 복음은 3년 주기로 나뉘어서 매 주일 읽혀집니다. 첫해를 ‘가’해로 정하고 이때 마태오 복음을 매주 선포합니다. 둘째 해는 ‘나’ 해로 마르코 복음을, 셋째 해는 ‘다’ 해로 루카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 복음 요한 복음은 주로 성탄과 부활 시기에 선포됩니다.

요한 복음은 그 어투부터 다른 공관 복음과 사뭇 다릅니다. 하느님의 신성을 중시하는 요한 복음은 읽을수록 신비로운 느낌이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처럼 ‘사랑’을 강조하는 복음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요한 복음의 13장 31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으로 13장에서 17장까지 아우르는 예수님의 “석별의 교훈”의 첫 부분입니다. “석별의 교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어 파스카 축제를 맞아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기 위해 다락방에 모였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을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고 나서 갑자기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랐고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라며 그럴 수 없다고 반항(?)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그러자 베드로는 “발 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십시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배신할 사람을 알려줍니다. 배신자 이스카리옷의 유다가 나가자 오늘의 복음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계명”에 대한 복음입니다. 남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나고 나면 살아가야 할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이는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며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십니다. 그 유언이 바로 사랑입니다. 또한 이 유언은 제자들이 어떻게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비밀 즉 구원의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그 비밀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이 사랑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그런데 어머니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다른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자신의 자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비슷할 수 있지만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 것과 남의 것에 대한 관계가 극명하게 달라집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 자식에 대한 무조건 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수도 있는 사랑입니다.그러나 그 대상은 바로 “친구”가 아닌 “내 자식”입니다. 따라서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지만 배타적인 사랑입니다. 고귀한사랑이지만 나의 어머니의 나에 대한 사랑에 한해서입니다.

이에 반에 하느님의 사랑은 내 자식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을 위한 보편적 사랑입니다. 마치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비를 공평히내리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사랑입니다. 차이는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에 있습니다.

이에 하느님의 사랑은 공평성에서 모든 이의 이해를 얻기 힘듭니다. 루카 복음의 “돌아온 탕자” (루카 15: 11-32) 이야기는 용서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비유하여 감동스럽지만 루카 복음 사가는 여기서 이야기를 마치지 않고 일에서 돌아오는 큰아들의 이야기를 삽입함으로써 하느님의 공평한 사랑이 사람들에게는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은 한 발 더 나아가 하느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따라 할 것을 명하십니다. 그 사랑이 비록  인간의 눈에는 불공평하게 보여도 예수님을 믿고 따라서 인류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최후의 만찬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공관 복음의 최후의 만찬은 제자들과 음식을 나누고 “빵 나눔과 포도주 나눔”을 당신을 기억하여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성체성사의 의미와 시작을 설명합니다. 이와 달리 요한 복음의 최후의 만찬 장면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서로 발을 씻어 주라고 명하십니다.

여담으로 누구에겐가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는지 아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간단합니다. “더러워서요.”

물론 맞는 답입니다. 당시 신발은 대개가 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좀 다니다 보면 발에 먼지가 많이 묻게 되고 집에 돌아오면손과 발을 씻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손은 쉽게 씻을 수 있지만 발은 불편하므로 누군가가 씻어주면 참 편하게 깨끗이 씻을 수있어 종들이 주인이나 귀한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즉 낮은 이가 높은 이에게 보이는 공경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관습적 의미를 뒤집어 버리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펄쩍 뛰며 반대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고위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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