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렐루야, 주님 부활하셨네!

2019년 4월 21일

봄이 되어 봄에 관한 시를 찾다 마치 내 맘속을 들어갔다 놓은 듯한 시구를 찾았습니다. “아름다운 곳”이라는 문정희 시인의 시인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그래도 지난주 ‘하상회’ 회원들이 성당 주변을 돌며 팬지와 임페이션스 꽃을 심어서 그런지 훨씬 봄 스럽습니다. 봄스러움은 역시 새싹과 꽃일 것입니다. 죽은 듯 한 가지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는 자연의 신비에 경탄할 뿐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기를 바랍니다. 무미건조한 삶에 생기가 돋고 새로움이 가득 찬 기쁜 삶을 기대하며 새싹 돋는 나무와 꽃을 부러워합니다.

시인도 그 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그리고 또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벚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

우리는 이 시인처럼 봄을 느끼기 위해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라는 바램은 있는가? 의문입니다. 그저 평안한 일상을 바라며 무탈하기만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에 봄은 오는가? 김춘수 시인의 꽃의 한 구절도 이를 대변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에 존재합니다. 그 마음을 현실화 시키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마음은 그저 “한여름 밤의 꿈”같은 바람일 뿐입니다. 봄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느껴지고, 그 봄을 믿는 이들에게 설렘을 선사합니다. 그 설렘은 가장 평범함 속에서도 커다란 행복을 느끼게 해줍니다.

설렘은 특별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함을 자세히 바라보며 그 미세한 차이와 다름을 발견할 때 우리의 마음에 싹이 트고 꽃이 핍니다. 일상의 무미건조함에 싹이 트고 꽃이 피는 봄은 바로 그렇게 옵니다. 우리가 이름을 부를 때 비로서 특별함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주님 부활도 마찬가집니다. 매년 이맘때면 습관처럼 지내는 40일간의 전례와 그 끝에 맞이하는 부활절.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입니다. 습관처럼 기도하고 습관처럼 미사 참례하고 어쩌다 솔깃한 강론에 잠시 가슴 뛰며 위로받는 주일과 각박한 세상에서 치열한 삶의 현장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도 허영이 되고 평화도 사치가 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결국 매해 똑같은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도 가슴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바로 설렘입니다. 그 설렘은 바로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기쁘고, 나의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도 힘이 됩니다. 매일 보는 얼굴에 매일 듣는 투정들이 지겹고 화가 날 때도 그 얼굴에 미소라도 띠면 좋고, 그 투정 속에 고마움이 배어 있음을 발견하면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설레고 행복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렇게 평범한 일상에서 그 차이를 발견하려는 마음이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그 평범함은 특별함이 되어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고목나무에도 봄 싹은 트듯이 우리의 삶에도 새로움이 생깁니다. 부활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우리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삶의 힘입니다.

또 어떤 때는 부활은 평범함이 아니라 극적인 비극 속에서 피어나기도 합니다.

지난 월요일 성주간을 시작하며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마에 휩쓸려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CNN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화재의 현장을 차마 보지 못하고 TV를 끄고 말았습니다. 가슴이 두근 거리고, 뉴스를 듣는 것 조차 거북하였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였습니다. 왜 성주간에 가톨릭 신앙의 역사가 깃든 성당이 불길 휩싸였는가?

물론 노트르담 성당은 작게 보면 파리 사람들의 자랑거리이고 프랑스의 자부심이고 역사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성당은 또한 우리 가톨릭 신앙의 자랑거리이며 자부심이고 신앙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관광객이 그 성당을 역사적 의미와 예술적 가치로 구경할지 모르지만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전이고 우리 신앙의 증거이며 본보기 입니다. 그래서 파스카 신비의 성삼일을 앞둔 시기에 화재는 그 의미를 찾기 위한 분주한 기도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화재가 진압되고 들려오는 소식은 불행한 순간 속에서도 빛나는 신앙의 증거입니다. 성당을 최대한 지키기 위한 소방대원들의 살신의 노력과 유물을 보호하기 위한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사람들이 인간 띠를 만들어 대부분의 유물을 구해내고 성당 건물의 주요 부분을 화마로부터 구해낸 신앙의 인간 승리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장 슬플 때 위로의 가치를 알게 되며,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에 희망이라는 친구가 언제나 곁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로 부활의 현장입니다.

어떤 이는 잃어버린 것에 집착하여 과거에 머물며 아파합니다. 또 어떤 이는 잃어버린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다시 채울 것을 계획하며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전자에 가깝습니다. 상실의 아픔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잃지 않기 위해 삶을 꼭 움켜쥐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 아프고 힘이 듭니다. 또한 잃지 않기 위해 움켜쥔 것 이외의 것을 다 잃어버리는 바보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힘든 삶을 원망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잃은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아직도 남은 것에 희망을 갖고 내일을 준비합니다. 당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그 사랑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당부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 고통 속에서도 야유하는 군중을 용서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제자들이 갑작스러운 주님의 죽음에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레아에서 기다리시며 만남을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평화와 성령을 주시며 세상으로 나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 명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불평하며 화를 내지만 내일을 준비하는 데 약합니다. 그저 불안과 고통속에서 내일로 떠밀려가는 부평초 같습니다. 그래서 더 잃지 않으려고 꼼짝 못하고 움추리며 집착하는 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삶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빈 자리에 새 것을 채울 계획을 세우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 옛날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료 여인들이 발견한 “빈 무덤”은 상실의 슬픔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이었음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노트르담의 성모님은 화마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모습을 준비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고통과 아픔은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상실의 어제를 기억하며 오늘 아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일의 희망을 준비하며 오늘의 아픔을 극복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빈 무덤”은 단순히 주검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삶의 증거인 것처럼,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움켜쥐고 견디어 내는 무한 반복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움켜쥔 삶은 결국 더 많은 것을 잃게 하고 움츠린 삶을 살게 합니다. 무엇인가를 하는 삶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삶을 살아갑니다. 의도하지 않은 게으름의 행복이 아니라 익숙한 편안함입니다. 그렇게 천천히 도태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프란시스 교황님은 지난 목요일 성유축성 미사에서 신부들에게 말합니다. 신부의 손은 단지 거룩한 성유만 만지는 것이 아니라 “병자 성사나 세례 때 성유를 도유한다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죄와 상처와 걱정까지 우리 손에 묻힌다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치유와 구원의 삶은 깨끗하고 고고한 삶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을 깨끗이 정화시키는 삶이며 가장 낮은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발견하는 삶입니다.

안일한 삶을 바라는 사람은 도태됩니다. 그러나 내일의 변화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설레는 삶이 기다립니다.바로 부활은 그렇게 우리의 삶에 찾아옵니다. “모두가 낯익은 작년의 것들”이 아니라 설레는 봄처럼…우리는 삶의 기적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오늘 예수님의 ‘빈 무덤’이 기쁨의 이유인 것처럼, 우리의 빈 마음과 빈 손이 희망의 이유입니다.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올 것이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처럼……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콜로새서3:1)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