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시기

2019년 3월 24일

보통 젊고 아직 한창 일할 수 있는 연령대의 사람이 안타까운 사고를 겪어 인생의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날 때, 하늘도 무심하다는 표현을 하곤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 앞에서, 사람은 늘 자기의 의지대로 불의한 사고를 미리 대처하고 그것을 피해 갈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불행한 사건을 두고, 인간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자신을 돕지 않았음을 탄식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늘을 탓하는 이러한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뜻하지 않은 일로 불행한 일을 겪거나 누군가를 갑자기 떠나보내게 될 때, 그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구하면서도, 불의한 사고를 비켜가게 해 주지 않으신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의 시야가 세상이라는 공간 안에 한정되어 있어서 넓게 바라보지 못해서 그럴 뿐, 예수님을 믿는 부활 신앙 안에서, 우리의 삶은 이승의 삶을 넘어 영원한 삶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이승에서 삶을 일찍 마친다고 해서 결코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저승에서의 삶은 하느님을 직접 뵈오며 살기에 더 은총이 가득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필리피서에서 자신에게는 죽는 것이 이득이라고 말하며,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사람이 겪는 불의한 사고는 불행으로만 여겨질 수 있는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삶을 믿는 이들이므로, 우리에게 불행이 있다면, 그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일 것입니다. 그러니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도 하느님을 성실히 믿다가 떠났으면 그것은 행복한 삶일 것이고, 일생을 평안하게 장수를 누리며 살았지만, 하느님을 전혀 믿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행한 삶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에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당시 이스라엘의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종교예식을 거행하는 갈릴레아 사람들을 살해한 일을 알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 사람들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해서 죄가 많은 것이 아니고, 누구나 회개하지 않으면 그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비록 갈릴레아 사람들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기준으로 그 사람들이 죄가 많아 불행을 겪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그보다는 회개하지 않고 자기 죄를 그대로 지고 사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실로암에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사람들을 언급하시면서, 그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멸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갑작스레 불의한 죽음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들이 불행함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그보다 더 불행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늘도 무심하다는 표현을 하곤 해도, 실제로 눈에 보이는 사건으로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판가름할 수는 없고, 그보다는 사람의 내면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을 판별할 수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사순 시기의 복음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회개는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위한 첫 번째 관문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내적으로 자신을 정화함으로써, 우리 영혼이 하느님을 더 잘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곧 자신의 내적 상태를 성찰하고,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데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이 있다면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점점 구원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게 될 일도 없기 때문에, 그만큼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멸망은 곧 육신이 아니라, 영혼의 멸망이고, 하느님과 더 이상 친교를 맺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계속해서 자신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할 수 있는 회개와 보속의 사순 시기가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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