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19년 7월 21일

연중 15주일로 내일은 중복이고 그다음 날 화요일은 대서입니다. 태양의 열기가 극에 달해 가히 폭염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날씨입니다. 중복과 대서에는 계곡으로 피서를 가는 때이기도 합니다. 농부들도 낮에는 일손을 놓고 마을 정자 그늘에서 피로를 피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뙤약볕이 곡식과 과일을 무르익게 하고 풍성한 가을의 수확을 약속하니 마음도 한결 평화로울 것입니다.

도시 생활은 농촌 생활과 달리 사계절 기계적으로 시간에 맞추어 출퇴근하며 일을 하니 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도 쉬는 주말에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시원한 공원이라도 가서 한가한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씨실과 날실로 옷감을 짜듯 일과 쉼은 서로 교차하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일이 우리의 삶을 넉넉하게 하면, 쉼을 우리가 일의 무게를 덜어주어 삶의 여유를 줍니다.

일이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고 쉼 또한 그렇습니다. 일과 쉼은 우리 삶 그 자체입니다. 일과 쉼 모두 우리 삶에서 육체적 정신적 가치를 충족 시켜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쉼은 단순히 일의 멈춤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쉼은 일의 멈춤으로 치부해버립니다. 그래서 쉼을 죄악시 취급하기도 하고, 쉼을 게으름의 증거로 보기도 합니다. 쉼이 필요한 사람이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일을 함으로써 오히려 큰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일할때 그 결과에 대한 목표와 기대가 있습니다. 그 목표와 기대를 충족했을 때 성취감을 느낍니다. 노고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습니다. 그 성취감에 취해 우리는 모든 것을 멈추어 버리거나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더 큰 성취감을 위해…우리는 이것을 일 중독자 (Workaholic)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네 쉼에는 목표가 없습니다. 기대도 없습니다. 우리네 쉼은 멈춤이기 때문입니다. 혹 그렇지 않으면 우리네 쉼은 또 다른 일의 연장일 때가 많습니다.

바로 쉼과 여행이 혼돈될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휴가 때에 여행을 갑니다. 더 많은 곳을 보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납니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자마자 곧 그 여행은 쉼이 아니라 쉼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일임을 알게 됩니다. 여행은 일상생활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을 보고 다른 문화를 접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됩니다. 전혀 새로운 자연 속에서 또는 새로운 도시 속에서 다른 세상을 접하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이며이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행은 일과 쉼이 공존하는 순례의 삶입니다.

결국 어느 선지자의 말처럼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났을 때처럼 처음 떠났던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듯이 여행은 자신으로 돌아오는순례입니다.

우리는 쉼은 게으름이 아니라 넘어졌기에 할 수 없이 가는 길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쉼은 어제를 반성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쉼은 자신의 발산하는 시간이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쉼은 일과 함께 거룩한 시간입니다. 하느님은 태초에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인 칠 일째에 쉼의 시간을 갖습니다. 바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입니다. 하느님과함께하고 가족과 함께하고 자신과 함께 즐기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내일의 일을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의미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합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마르타는 예수님을 대접할 준비를 하느라 부엌에서 바쁜 시간을 갖습니다. 도와줄 사람이 필요로 하지만 도와줄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야속합니다.

결국 마르타는 예수님께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루카 10:40)

우리 일상에서 흔히 듣는 말입니다. 일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불평입니다. “왜 나만 일하지?” “왜 나만 문제를 해결하지?” “왜 나만 용서하지?” “왜 나만 손해 보지?” “왜 나만 고통을 받아야 하지?” 등등 이에 반에 “재는 왜 나를 도와주지 않지?” “재가 도와주면 훨씬 쉬울 텐데…….”

우리는 일의 거룩함과 쉼의 거룩함을 잊고 살아갑니다. 일은 고난이고 쉼은 게으름입니다. 일은 고통의 원천이고 쉼은 이기적이라고 여깁니다.

오늘 마르타에게 마리아는 이기적인 동생입니다. 오늘 마르타에게 예수님은 무책임한 어른입니다. 예수님과 마리아가 야속합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예수님 대접을 준비하던 마르타는 갑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잊었습니다.

반가운 손님을 대접하는 기쁨은 이제 고통과 야속함으로 가득 찬 부담이 되어버렸습니다. 행복한 순간이 불행한 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바쁘게 일하는 데 왜 너는 쉬고 있지?”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1)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42)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마리아의 쉼은 바로 말씀 안에서 삶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그 준비의 중심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화해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위로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삶의 원천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쉼을 택했습니다. 이 거룩한 쉼은 내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쉼이 아니라 내일을 준비하는 희망이 가득한 쉼입니다.

일이 단순히 삶의 무게가 아니라 거룩한 것처럼 쉼 또한 게으름이 아니라 거룩한 삶의 한 부분입니다.

마리아의 쉼이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처럼 우리의 쉼도 경청으로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가족의 말을 들어주고, 친구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면서 시작합니다. 쉼은 자신을 발산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받아들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쉼은 자신 안으로의 여행 같습니다. 일을 마치고 지친 몸과 마음을 돌아보는 여행입니다. 자신 안에 위로받지 못한 섭섭한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신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염려와 걱정보다는 내일의 새로운 시작에 희망을 품었습니다.

결국 우리 삶의 매시간 매초가 거룩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참 좋다.”고 감탄한 존재의 삶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릅니다. 삶의 거룩함은 나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데서 시작합니다. 삶의 거룩함은 내 주변의 모든 이를 거룩하게 여기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는 서로비교하지 않고 각 존재 그 자체를 온전히 인정해주고 봐주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는 결국 “염려와 걱정”이 아니라 “설렘과 기쁨”일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습니다. 마르타의 선택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에게 불만을 느끼었습니다. 마르타의 선택도 소중하고 거룩하지만, 마리아를 보고 비교하면서 그 거룩함을 잃고 기쁨을 잃었습니다. 그 순간 일은 더이상 거룩함이 아니라 저주가 되어버렸습니다. 일은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 되어버렸습니다. 비극의 시작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일과 쉼은 모두 삶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삶의 신비입니다.

오늘 폭염이 우리에게 쉬어갈 이유를 줍니다. 오늘의 폭염은 족구 대회도 연기하게 할 정도로 뜨겁습니다. 오늘은 쉼의 몫을 선택하고 내일 열정적인 일을 선택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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