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0년 2월 16일

연중 6주간을 맞이합니다. 아직도 코로나바이러스에 관심이 증폭되는 상황이 지속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직도 두려움이나 공포로 과잉반응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이 또한 이해 못 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믿음이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조심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5장 산상수훈의 초입 부분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에 이끄시어 광야에서 40일 밤낮으로 단식과 함께 기도하시며 3가지 유혹을 이겨내시고 갈릴래아로 가시어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공생활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서 세상에 오신 그 목적인 세상 구원 활동을 말합니다. 이때가 예수님 나이 30이었습니다. 광야에서의 유혹으로 시작하는 구원 사업은 제자들과 함께 3년간 이스라엘 전역과 주변 국가들을 주유하시며 하느님의 말씀이신 기쁜 소식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고 회개하여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과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며 고통받는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시어 따르던 군중들에게 설교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설교” 또는 “산상 수훈”이라 부르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설교는 5장에서 7장까지 3장에 걸쳐 설교를 하십니다. 산상에 오르시어 설교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 복음의 독자들인 유대인들은 ‘모세’를 떠올릴 것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순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빠지고 의욕을 잃고 믿음을 잃고 헤맬 때 모세는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내려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본법의 시작입니다. 모세 율법의 시작입니다.

그 설교의 시작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복팔단”입니다. 바로 참 행복 선언입니다. 이 선언으로 예수님의 구원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해집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참조 5: 3-12)

이러한 사람들은 바로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법을 드러내는 소금이며 빛이라는 것입니다. (참조 5:13-16)

오늘의 복음은 이에 이어 모세 율법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7-18)

시나이산에 오르시어 하느님으로부터 10계명을 받아온 모세처럼 예수님은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단순히 율법을 소개시키는 것을 넘어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선언에서 율법의 중요성과 정당성을 단호하게 천명하십니다. 모세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이는 마태오 복음의 특징입니다. 지난 대림 때 마태오 복음의 특징을 설명한 것처럼 마태오 복음의 주요 독자는 유대인들입니다. 특히 외국의 디아스포라(유대 이민자의 밀집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들려주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공생활의 행적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이들에게 대단히 중요하고 그 율법을 하느님으로부터 전해준 모세는 바로 유대인의 해방자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산상설교의 도입부터 연상케 하는 모세는 바로 예수님의 정체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바로 해방자로서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를 넘어서 적어도 모세와 같은 해방자이며 나아가 그 법 위의 그리스도임을 드러내는 설교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간단히 두 파트로 나누어집니다. 첫 부분은 위에 설명한 5장 17-20까지의 율법에 대한 중요성과 정당성이고 둘째 부분은 21절부터 37까지의 율법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해석입니다.

법은 언뜻 보면 굉장히 논리적이고 옳고 그름이 명쾌해 보이지만 사실 그 해석의 차이에 따라서 이헌령 비헌령식의 판단의 명쾌함이 무디어진다는 맹점이 있습니다. 현대의 법도 그래서 그 법령이 점점 늘어나 너무 많은 법 조항으로 어떤 법은 사장되어버린 법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죄를 짓고도 어떤 이는 무죄가 되고 또 어떤 이는 유죄가 됩니다. 그 것은 법을 해석하는 직위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에게 관대하게 해석하고 없는 이에게 비정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의 정신이 중요합니다. 그 법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배경과 이유가 그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율법 기본 정신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통한 서로에 관한 관계 개선입니다. 즉 화해를 말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며 더불어 같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느님의 법의 기본 정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21장에서 37장은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해석은 이 정신이 잘 드러납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단순한 살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미움을 용서하고 화해해서 사랑으로 승화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형제들이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나아가 서로 헐뜯는 것은 살인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간음과 아내를 버리는 것도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 즉 자비로 해석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우리는 욕망을 이기는 더 큰 이상에 눈을 두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욕망은 눈을 멀게 하고 생각을 멎게 하며 자기 안에 갇히게 합니다. 그래서 자기 합리화를 하고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각을 단순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와 “아니오”라 간단히 답하라고 하십니다.

“예”와 “아니오”의 기준은 바로 하느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비로 드러납니다.

결국 율법은 내 중심의 해석이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는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해석으로 율법을 보면 한 자 한 획도 버릴 것이 없는 하느님의 법이라는 사실이 틀림 없습니다.

우리는 참 복잡한 세상에 살고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행복해지길 갈망합니다. 그 행복의 길이 물질적 풍요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사회적 명예와 권위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명예와 권위를 넘어서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바로 ‘진복팔단’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임을 알게됩니다. 행복하여라. 서로 믿고 배려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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