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1년 4월 7일

오늘은 부활 8일 축제 수요일 4월 7일 부활과 함께 봄이 무르익어 가고 거리의 꽃이 만개하여 아름답습니다. 우리 성당의 꽃들도 하루가 다르게 활짝 펴고 있습니다. 성당 앞을 지날 때 하얀 천을 두른 십자가 앞으로 도열한 백합꽃이 성모님의 지극한 사랑과 신심처럼 아름답습니다. 마치 우리가 도열한 듯 합니다.

살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요즘 새로운 물건을 많이 팔게 하기위해서 단순히 물건의 정보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의 뒷이야기를 알려주려하고 그 물건이 왜 만들어 졌는지 그 의미까지 곁들여 이야기 해줍니다. 이것을 요즘 Stroy Telling이라고도 합니다. 즉 그 물건의 사연을 말해줌으로써 그 물건과 친밀한 느낌을 받아 쉽게 사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중요한 스토리 텔링을 상품 마케팅에 접목한 것입다.

이렇게 한 물건에도 그 사연이 친밀감을 주듯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고 친해지고 동료가 됩니다. 이야기 나눔이 대화입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 시간이 대화의 시간이고 삶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대화를 한 주제로 주고 받는 것만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대화의 일부분입니다. 하나의 주제로 토론 하는 대화가 아니라 그저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것이 대화입니다. 이 대화에는 옳고 그름의 판단이 없어야합니다. 단지 느낌만 표현하면 됩니다. 그 느낌도 꼭 입으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표정이나 추임새면 최고입니다.

대화의 단절의 이유는 언제나 판단입니다. 잘했다 못했다, 왝 그랬냐 등등. 상대방의 이야기에서 상대방을 지적하거나 반대급부를 설득하려하지 않아야합니다. 설득하려 하면 이미 대화가 아닙니다. 설교입니다. 이야기는 사상의 논쟁이 아니라 삶의 나눔입니다. 그래서 느낌의 나눔이면 충분합니다. 감동적이다. 슬프다. 화가난다. 안타깝다. 억울하다…잘 모르겠다. 등등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유명한 “엠마오 가는 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사흘이 지나 낙담한 제자 둘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어느 나그네를 만나 길동무를 하며 나눈 이야기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나그네는 제자들에게 침통한 이유를 물어보고 제다들은 그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 합니다. 그들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고 돌아가셔서 안타까워 낙담하던 차에 그들 가운데 몇몇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빈 무덤만 보고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다가 천사를 만나 주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직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이에 나그네는 그 두 사람에게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 25-26) 하고 성경 말씀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이에 두 제자는 감동을 하며 엠마오에 다다랐을 때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권하여, 그 나그네는 그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합니다.

그들이 식탁에 앉았을 때, 나그네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자 그들의 눈이 열려서 그 나그네가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걸어오던 길을 되돌아 봅니다. “길에서 우링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시 않았던가?”(24: 32)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전하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11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하는 말을 듣습니다. 이에 그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특히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해줍니다. (24: 34)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역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야기꾼입니다. 이렇게 설교는 간단하게 이야기는 관심을 끌 수 있게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판단 보다는 느낌을 중요시 합니다. 우리들의 이성적 판단 보다는 우리의 느낌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성적 판단의 끝은 옳고 그름입니다. 그다음의 행동의 우리의 의지입니다. 그 의지는 이성적 판단을 바탕으로 우리의 느낌이 좌지우지 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 이성적으로 옳다고 판단하더라도 (어떤 이는 이는 이성적으로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오히려 그의 삶의 의지를 저하시키거나 그의 게으름을 정당화 한다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가난한 이를 보면 안타까워하기 보다는 화를 냅니다. 예수님과 다른 판단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으면 선뜻 주머니에 손이 가지 않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자신들이 들어오던 이야기 방법이나 설명에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시던 성경 풀이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 말씀에서 마음이 타올랐습니다.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빵을 떼어 나눌 때야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사의 이야기 입니다.

말씀의 전례와 성체 성사로 이루어지는 우리 미사의 구조는 오늘 엠마오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낙담하고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처럼 말씀과 빵 나눔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말씀에서 느낀 뜨거운 느낌과 성체를 통한 확신은 일상에서 우리가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이야기에서 서로의 삶을 나눕니다.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감동하고 하나가 됩니다. 이야기는 판단이 아니라 느낌입니다. 가벼운 이야길 들으며 그저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여도 됩니다. 일상의 이야기에서 옳고 그름은 의미가 없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벼들면” 이야기 뿐만 아니라 관계가 서먹해집니다.

예수님은 심각한 설교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가벼운 이야기 나눔에 서로 느낌을 나눌 때 예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뜨거운 감동에, 애절한 슬픔에, 아까까운 마음에, 억울함에 같이 화를 내어줄 때 우리는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고, 커피와 달달한 빵과 함께 나누며 금상첨화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삶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에서 우리의 고뇌와 수난을 나누고, 예수님의 죽음에서 우리의 실패와 절망을 나누고, 예수님의 부활에서 뜨거운 삶의 열정을 나눕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 두 제자처럼 우리의 소소한 삶의 이야기에서 만난 예수님을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부속가
파스카희생제물우리모두찬미하세.
그리스도죄인들을아버지께화해시켜
무죄하신어린양이양떼들을구하셨네
죽음생명싸움에서참혹하게돌아가신
불사불멸용사께서다시살아다스리네.
마리아말하여라무엇을보았는지.
살아나신주님무덤부활하신주님영광
목격자천사들과수의염포난보았네.
그리스도나의희망죽음에서부활했네.
너희보다먼저앞서갈릴래아가시리라.
그리스도부활하심저희굳게믿사오니
승리하신임금님자비를베푸소서.

시편 105(104),1-2.3-4.6-7.8-9(◎ 3ㄴ)
◎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알렐루야.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 민족들에게 알려라.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
○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
○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
○ 명령하신 말씀 천대에 이르도록,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시니,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며, 이사악에게 내리신 맹세라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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