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1년 4월 5일

알렐루야, 기뻐하십시요.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4월 5일입니다. 완연한 봄의 날씨가 주님 부활과 함께 기쁜 하루를 보내기에 참 좋은 날입니다. 업무에 빠쁘더라도 시간을 내시어 적어도 10분 정도 산책을 하시어도 참 좋겠습니다. 산책중 부활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더욱 좋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빈 무덤’으로 표현됩니다. 유다인들은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부활은 그저 허무 맹랑한 소리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 부활은 희망의 이유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존재 이유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 신앙 그자체입니다. 부활이 없는 주님의 말씀은 공허한 울림에 불과합니다. 부활이 없는 주님의 말씀은 그저 지혜가 가득한 한 성현의 옛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주님의 말씀에 생명을 주고, 힘을 주고 권위를 주며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실천하며 따랴야 할 당위성을 줍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목적을 말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삶을 약속하며 증거합니다. 죽음의 두려움없이 당당하게 살아갈 이유가 됩니다.

그렇기에 겨울의 언 땅을 뚫고 올라온 튤립이 활짝 만개한 아름다움같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에서 삶이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삶의 고난 중에도 빙그래 웃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어제 부활 주일의 미사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작년 팬데믹의 락다운(Lock down) 이후로 성당에 못나오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유튜브로 신앙 생활을 하던 많은 분들이 미사에 참례했기 때문입니다. 남신부님의 말씀대로 한분 한분이 샛별처럼 빛나 성당을 발게 빛냈습니다. 성당을 장식한 어느꽃 보다도 아름다웠습니다. 반가움에 목소리가 떨리기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백신을 맞아서인지 부활절 때문인지 표정이 밝고 편안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성당앞에서 담소를 나누는 광경이 팬데믹 이전의 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어서 빨리 이 팬데믹이 끝나 예전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며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완전히 끝나는 날까지 안전 수칙을 엄격히 준수해야합니다.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부활 상황입니다. 네개의 복음의 부활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된 점은 첫 부활의 발견한 이들은 여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여러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첫째는 여자 제자들의 역할입니다. 공식적으로는 12제자들이 남자들로 구성되었지만, 실제로 많은 여성 제자들이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성모님과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밖에 많은 여성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며 예수님의 전교에 경제적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둘째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들의 음모의 반증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져 갔다는 소문을 퍼트리게 합니다.(28: 12-13) 그러네 무덤에 간 이들은 12제자나 다른 남자들이 아니라 여자들이었습니다. 이는 무덤을 막고 있는 돌문을 그들의 힘으로 열 수 없다는 사실로 수석 사제들의 음모를 반증합니다.

셋째는 당시의 문화적 배경으로 여자의 증언은 그 힘이 참으로 약했습니다. 남자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나 대외적으로는 여성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 신빙성을 의심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부활의 최초 발견자들은 여자 제자들입니다. 그들의 제보를 받고 베드로와 요한 등 12제자 중 몇몇이 무덤으로가 부활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렇기에 부활의 대외적 신빙성을 높이려면 여자들의 발견을 삭제하고 베드로와 요한의 증언만 인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다는 역설적인 반증이기도 합니다.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구지 사실을 오도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서도 않되고, 부활 사실을 진실이기에 그를 믿게 하려고 수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강한 믿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에수님은 믿지 않는 이들을 저주하거나 혼내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들의 불신을 안타까워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이들을 들어라.” 따라서 제자들도 믿지 않는 이들에게 구지 사실을 오도하며 믿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들의 귀가 예수님의 말씀에 열릴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진실을 전할 뿐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과정이 잘못되면 그 좋은 일이 퇴색되고 맙니다. 법적 수사에서 쓰는 말로 “독수독과”와 같습니다. 독이 든 나무에서는 독이 든 열매만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의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정당화 하기보다 수단을 충실히 행하면 목적은 처음에 의도한 것과 다를 수 있어도 좋은 수단이 이끌어주는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방식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보여주신 섬김의 자세입니다. 서로의 발을 씻겨 주는 봉사의 자세로 가족을 대하고 이웃을 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우리 신앙의 사명입니다.

부활의 아름다움은 믿는 이들에게만 드러납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은 믿는 이들에게만 들립니다. 부활의 영광은 믿는 이들이 받습니다. 믿는 이들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일상에서 실천하려 고군분투하기 때문입니다.

부활 성야에 붙여진 커다란 부활초는 오늘도 환하게 타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부활의 상징입니다. 부활초에서 나누어진 작은 촛불인 우리도 오늘 밝게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으로 어둠을 밝히고 빙그레 웃는 얽굴로 이웃의 어두운 얼굴을 밝게 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소소하지만 우리 부활의 파스카 신비의 실천입니다. 성모상 앞 장미의 꽃봉오리가 올라옵니다. 곧 아름답게 만개할 것입니다. 우리의 빙그레 웃는 미소처럼……

시편 16(15),1-2ㄱ과 5.7-8.9-10.11(◎ 1)

◎ 알렐루야.
○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주님께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주님.” 주님은 제 몫의 유산, 저의 잔. 당신이 제 운명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 ◎
○ 저를 타이르시는 주님 찬미하오니, 한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깨우나이다. 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 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
○ 제 마음 기뻐하고 제 영혼 뛰노니, 제 육신도 편안히 쉬리이다. 당신은 제 영혼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구렁을 보지 않게 하시나이다. ◎
○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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