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0년 1월 19일

어느새 새해 첫 달의 중순이 지나고 있습니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고 우리의 마음도 그만큼 바쁜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 주기를 기준으로 만든 하루와 한 해의 시간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극히 똑같은 시간을 살아갑니다.  지구의 자전 주기로 한 하루의 시간 기계적으로 나눈 24시간, 1,440분, 86,400초의 시간입니다.

늘 똑같은 시간인데 점점 빠르게 흐른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우리의 삶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아주 힘들게 한 가지 일을 하고 쉬면 되었지만 요즘은 문명의 이기로 일이 훨씬 쉬워지고 간편해졌지만 같은 시간에 훨씬 더 많고 다양한 일을 해야 하기에 정신적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하루의 시간은 그만큼 빨라집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시간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결국 옛날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벌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삶은 여전히  녹록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병중에 정신적 스트레스에 의한 병이 많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줍니다.

현대인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자 자신의 삶의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그런데 가장 문제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육체적 고통처럼 보이는 압박이 아니기에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고통이 다른 이들의 고통보다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남을 위로하기보다는 자신이 위로받지 못하다는 서운함을 호소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평화를 갈구합니다. 그러나 그 평화의 모습은 예전과 다릅니다. 예전의 평화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주를 이룬다면 현대는 자신 안의 평화를 갈구하는 면이 많아집니다. 그만큼 우리는 복잡한 사회를 살아갑니다. 위로가 필요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들에게 더없이 필요한 분이 바로 임마누엘 예수님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가 더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오늘 연중 2주일 복음은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복음도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을 간접적으로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4개 복음 모두에 나오는 가장 핵심적인 복음입니다.

공관복음의 예수님 세례 사건은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직접 화법으로 사건을 설명하지만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점이 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요한이 직접 증언을 합니다.

4대 복음 모두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세례자 요한과 관계에서 시작되고 세례식은 그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활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의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여기에서 성서학자들은 제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음을 유추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증언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는데 특히 첫 제자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이렇게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정말 기다리던 메시아인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진정한 메시아이고 요한은 메시아를 알리는 하느님의 예언자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첫 부분에서도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예수님은 요한이 증언한 바로 그 빛이라는 사실을 복음의 서두에 강조합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는 지속해서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 11장에는 감옥에 갇힌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확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3절) 이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스라엘의 사회 정치는 참으로 어지러운 시대였습니다. 로마 식민지로서 괴뢰 왕권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였습니다. 로마의 힘과 왕의 권위 사이에서 사회는 혼란스럽고 약탈과 착취가 자행되던 시대였습니다.

성경에서도 나오듯이 세리로 대변되는 착취자와 대사제의 기득권자 그리고 율법 학자들이 율법의 권위에 갇혀 민중의 아픈 현실을 외면하는 세태를 예수님은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정치 경제 혁명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의 현실적인 아픔에 대한 위로였습니다. 아파하는 사실을 알아주는 것으로 하느님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왕을 단죄하지도 총독을 단죄하지도 않습니다. 먼저 아파하는 민중의 마음입니다. 죄의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용서’라는 치유의 기적을 주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기보다 이해하고 용서하심으로서 구원하십니다. 저 높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구원의 신비는 가장 낮고 힘없는 이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바로 언 땅을 비집고 피어나는 새싹과 같이 파괴가 아니라 창조의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환경에서 잘 드러납니다. 다윗 왕의 자손이긴 하지만 요셉이나 마리아는 부유한 가문의 출신이 아닙니다. 사회적 명망과 권위가 높은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보통의 가정이지만 죽음을 불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정도로 신앙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요한으로부터 겸손하게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늘의 소리가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요한복음에서의 예수님 세례는 예수님의 관점이 아니라 요한의 관점에서 서술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를 주면서 듣고 본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듯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 양”입니다. 바로 희생양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위한 희생양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바로 희생입니다. 그 희생은 사랑과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가장 작은 것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자비라면 그 자비가 예수님 구원의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그 자비는 바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할 수 있는 힘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오늘 간절히 비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풍요가 아니라 위로받지 못한 가슴에 단비처럼 뿌리는 위로입니다. “너도 아프구나.” “너도 힘들구나.”라고 알아주는 간단한 말 한마디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시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중략]…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짊어지기 힘든 짐을 지고 내일을 향해 나아갑니다. 내 짐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이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위로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위로의 힘으로 다른 이들을 위로해주면 더 큰 위로가 또다시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옴을 경험합니다. 프란시스코 성인의 기도가 오늘 제 가슴에 큰 울림을 주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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