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3년 6월 4일

오늘은 연중 제9주일이면서 예수 성심 성월인 유월의 첫째 주일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시간은 기다림이 없습니다. 그저 무심하게 흐를 뿐입니다. 강물의 흐름을 막는 저수보도 같은 것도 시간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천천히 또는 빨리 흘러갑니다. 그대로 다행인 것은 지구의 시간은 일정합니다. 우리네 시간이 일정하다는 것입니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오고, 봄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여름이 봄을 채웁니다. 그리고 가을이……

  그런데도 어떤 이는 지나간 시간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과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과거의 향수나 과거의 상처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합니다. 시간은 계속 미래로 흐르는 데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연어는 거친 물살을 거슬러 자신이 태어난 곳에 가서 알을 낳고 죽습니다. 연어에게는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만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안타까운 회귀입니다. 삶의 어느 순간 시간의 흐름이 자신의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현실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시간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지향적입니다. 우리의 현재는 내일을 준비합니다. 내일은 오늘 우리의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과거는 오늘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실패도 고귀하고 성공의 영광도 오늘의 밑거름이 됩니다.

  연어가 거칠고 힘든 싸움을 하면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희생적 노력입니다.  그래서 과거는 우리가 시작한 출발점이기에 소중하고, 오늘은 과정이기에 아름답고, 내일은 우리의 목표이기에 영광스럽습니다. 언제나 어디서 우리의 출발점을 아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에 소중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변하면 내일을 향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적 의미가 없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만 한다면 오늘을 허비하는 것이므로 내일이 없습니다.

  오늘은 거룩한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냅니다. 지난 주일 성령 강림으로 인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말씀이신 아드님과 우리를 보호하시고 거룩하게 사시는 성령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느님을 완성하셨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도 미래를 향한 여정의 하느님이시며, 시간을 통하여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세상을 위하여 자신 스스로 변하시는 분이심을 확인합니다.

  먼저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당신의 외 아드님이신 ‘말씀’을 사람이 되게 하시어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순명으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한 아드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아드님을 대신하여 말씀이 살아 숨 쉬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변화하는 하느님의 정체는 우리 삶의 발전의 이유입니다.

  이 모든 역사의 시작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유 없는 배려이며 자비이고 희생입니다. 굳이 사랑의 이유를 따지자면 부모님의 자식 사랑이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라면, 하느님의 세상사랑은 당신께서 직접 말씀을 통하여 창조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특히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과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단지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에 하느님께서 살아 숨 쉬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을 좀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선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오늘 복음인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3: 16)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부자이건 가난한 이건, 그리스 사람이든 유대인이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귀족이든 천민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간에 모든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천명하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편을 가릅니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높고 낮으므로 가르고, 가진 이와  못 가진 이를 가릅니다. 심지어 어느 지역 출신인가 하는 문제로도 가릅니다. 참 네 편 내 편으로 가르기를 좋아하고, 그를 통해 안정감을 가지려 노력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문제는 편견과 오만입니다. 자신을 남들 위해 드러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삶이 황폐해진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립니다. 이는 오만에 가득 차 자신을 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쓰러진 다음에야 비로소 뒤를 돌아다봅니다.

  마크 트윈은 이런 말을 합니다. “곤경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뭔가를 확실하게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What gets us into trouble is not what we don’t know. It’s what we know for sure that just ain’t so.)”

  우리의 착각은 자만과 오만과 편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언제나 겸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겸손의 지혜입니다. 겸손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잊지 않았나 살피는 성령이고, 다른 시간에 다른 지역의 다른 사람들의 다른 말과 다른 삶의 방식을 배려하는 성령입니다.

  자만과 거만 그리고 오만의 극치는 편견을 낳고, 편견은 실패의 이유입니다. 그런 이들은 문제를 자신 안에서 찾지 않고 언제나 밖에서 찾으려 합니다. 자신이 아니라 남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언제나 남을 미워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려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토록 질타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희생자라는 프레임에 스스로를 피해자이며 희생양이라고 합리화하려 합니다.

  오늘 삼위일체 하느님의 정체를 완성하시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실체를 우리 삶에서 경험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시며, 우리를 보호하시는 진리의 영이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은총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지혜를 더해주시고, 우리를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겸손의 배려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나아가 이는 우리 각자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며 우리 모두 함께 더불어 미래를 향해 오늘을 살아가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생기 돋워 주소서. 일할 때에 휴식을, 무더울 때 바람을, 슬플 때에 위로를. 지복의 빛이시여, 우리 맘 깊은 곳을 가득히 채우소서. 주님 도움 없으면, 우리 삶 그 모든 것, 이로운 것 없으리. 허물은 씻어 주고, 마른 땅 물 주시고, 병든 것 고치소서. 굳은 맘 풀어 주고, 찬 마음 데우시고, 바른 길 이끄소서.” (성령송가 중에서)

  태초 혼돈의 세상을 정리하시어 만물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루었습니다. 때가 차자 아버지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세상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구원의 이유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해주고픈 열정의 마음입니다.

  이유가 있는 사랑은 변합니다. 그러나 이유가 없는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할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성령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나아가 엄마의 사랑에서 이 사랑을 실체를 경험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또 이렇게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에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 17)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은 심판과 처벌의 하느님이 아니라 구원의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발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지 않는데 왜 세상은 서로 각자의 정의를 주장하면서 심판할까요? 사람의 정의는 이혈령비혈령식의 정의입니다. 코애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 걸이식의 정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만이 옳다며 남들을 모두 죄인 취급합니다. 참 안타까운 사태입니다.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며 우리의 삶을 되돌아봐야겠습니다. 성령의 마음으로 성령의 눈으로 성령의 귀로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면 참으로 부끄럽지만, 과거의 상처에 머물던 우리는 미래를 향해 떠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과거의 연속이 아니라 내일 미래를 향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과 함께 미래를 향해 오늘 살아가는 미래지향적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을 사는 우리의 기도는 이것입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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