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3년 2월 26일

오늘은 이월의 마지막 주일이면서 사순 시기 첫째 주일입니다. 지난 재의 수요일 우리는 우리 얼굴의 중심인 이마에 재를 발랐습니다. 이마의 검은 재는 우리가 남들과 다르다는 표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도 더욱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성인이라는 표시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우리 이마의 그 선명한 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낱 재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말씀과 입김으로 사람이 되었음을 알려줄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그 재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재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우리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고,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재를 이마에 바를 때 사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재에서 왔으니 재로 돌아가라.” 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두 말은 모두 우리가 어떻게 사순 시기를 시작하고, 어떻게 끝맺을지를 알려줍니다. 사순의 이유와 목적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입김으로 생명을 얻은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믿고 따를 때 완성된다는 운명을 알려줍니다.

 

이는 태초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시작된 원죄의 결과를 우리의 믿음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입니다. 거역의 이유는 욕망입니다. 끝없는 욕망은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여정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십 일간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홀로 또 함께 삶을 완성해 가는 여정을 떠난 것입니다. 겨울이 봄을 기다리듯, 하늘의 해가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듯 우리의 삶이 주님의 모습과 더욱 닮기를 갈망하며 떠난 여정입니다.

 

변화는 각 개인으로 시작하지만 이는 함께 더불어 노력할 때 더욱 가능합니다. 이는 나아가 서로가 변하여 공동체 자체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변화의 시작은 ‘너’가 아니라 ‘나’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의 눈이 ‘너’를 먼저 보고, 우리의 손가락이 ‘너’를 먼저 가리키고, 우리 마음이 ‘너’를 먼저 원망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언제나 나 이외의 밖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억울해하고, 분해하고, 미워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너’를 필요로 하고, ‘너’와 함께 살아갑니다. 미워하고 사랑하면서…괴로워하고 또 기뻐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삶의 미움과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여정입니다. 이를 위한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소유적이며 편협적이고 이기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하느님의 사랑은 이타적이고 자비이며 나눔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 13) 예수님은 우리가 말씀을 따르면 우리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5: 12)

 

사십 일 동안 우리는 기도하고 재계하고 자선을 베풀면서 우리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참 좋다.’고 감탄하신 그 아름다운 존재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이 여정의 끝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보여주신 수난의 의미가 부활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며 벅찬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희망이 우리를 서로 예수님처럼 사랑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혹에 약한 존재입니다. 태초의 아담과 이브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매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유혹과 마주칩니다. 달콤하고도 매혹적인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담이 그랬고, 이브가 그랬듯이 문제는 늘 내가 아니라 너라고 손가락질하는 유혹 안에서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한 예수님의 광야 이야기입니다. (마태오 4: 1-11)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물로 세례를 받자마자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십니다. 거시서 예수님은 사십일을 밤낮으로 단식을 하여서 시장하고 약해지셨습니다. 그때 사탄은 유혹합니다.

 

배고픈 이에게 빵의 유혹보다 더 절박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유혹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유혹에는 언제나 달콤하고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혹이 유혹다운 것은 유혹이 유혹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절박하다는 이유로 유혹에 빠져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를 이기는 방법을 잘 알려주셨습니다. 배고픔은 나눔으로 이겨냅니다. 사랑은 나눔입니다. 나눌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나의 배고픔에 누군가 건넨 빵 한 조각에 감동하듯이, 내가 건넨 빵 한 조각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합니다.

 

빵을 건넬 때는 그 빵이 다신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빵을 어떻게 먹는지 상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누는 마음 그대로가 복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었듯이, 우리의 믿음과 희망은 사랑이 되고, 사랑은 우리 안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유혹을 이겨냅니다.

 

유혹은 우리를 자꾸 나약하게 만듭니다. 의미 없이 기대합니다. 내 노력이 아니라 남의 힘을 빌려 내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이들 도우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소원은 뭐든 들어주는 호리병 속의 지니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더욱 강하고 지혜로워지게 해서 우리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유혹은 남들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을 이용합니다. 남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고, 또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이 유혹을 부릅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모두가 일장춘몽입니다. 영원한 권력과 부는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언젠가 나와 내 주변의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이는 또한 남의 입에 미소를 짓게 하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군림과 세도는 그저 욕망의 열매이며 불행의 씨앗입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어지게 하는 길입니다.

 

이 모든 유혹을 이기시고 예수님은 광야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십니다. 이는 당신의 여정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세상의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여정에 초대하십니다. 사순 시기는 그 여정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정 길에 동반자가 되시고, 우리가 지치면 응원해주시고, 우리가 쓰러지면 우리를 당신 품에 안고 가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사순 시기는 사십 일 동안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용기를 내어라.” 하신 예수님을 믿고 떠나는 여정 길입니다.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