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2년 11월 27일

오늘은 드디어 전례력 새해를 맞이하는 대림 제1주일을 맞이합니다. 지난 주간 추수감사절을 통해 주님과 이웃에 감사하며 새해를 준비하였고 오늘 새해 첫 날을 맞이합니다.

 전례력은 매해 12월 25일 성탄절 4주일 전에 성탄을 기다리며 시작합니다. 그 시작을 대림절이라고 하는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을 기다리며 맞이할 준비를 하는 기간입니다. 즉 우리는 한 해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그 기다림의 첫날인 대림 첫 주일입니다.

 전례력은 또한 매 3년 주기로 매해 각 공관복음을 주제로 시작합니다. 이를 가, 나, 다 해로 구분하는데, 가 해는 마태오 복음을 중심으로 주일 복음을 구성하고, 나 해는 마르코 복음을 중심으로, 또 다 해는 루카 복음을 중심으로 편집합니다.

 지난 주일까지 루카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시작하는 새해는 ‘가해’로 마태오 복음을 들으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공관복음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을 이르는 데 그 내용이 매우 유사하고 어느 부분은 아주 똑같아서 같은 원전 (Q source)를 보고 베껴 쓴 것 같아 같은 시각에서 쓴 복음이라는 의미로 같을 공자와 볼 관자를 써서 공관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글은 그 작자의 의도에 따라 그 의미나 중점이 달라지는 것처럼 내용이 비슷하거나 똑같아도 복음 작자가 다르기 때문에 그 의도하는 바가 조금씩 다릅니다.

 예를 들어 마르코 복음은 세 복음 중에 가장 짧지만 가장 많은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를 서술합니다. 이는 그 복음이 기본적으로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굳은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통하여 그들도 박해에 직면하여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또 루카 복음은 올 한 해 들어온 복음으로 주된 독자는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 계통의 도시에 사는 이방인들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 대한 자비심이 강조되었고, 특히 성령의 역할이 강조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탄생 비화에서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었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듣게 되는 마태오 복음은 그 주된 독자가 디아스포라에 사는 유대인들입니다. (디아스포라는 뉴욕에서 흔히 말하는 케토라고도 하는 유대 이주민의 집단 거주 지역입니다. 유대인들은 신앙생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타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면 한 지역에 몰려 살았습니다. 이 지역을 그리스어로 디아스포라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의 독자는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많은 이들이 바리사이였습니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에는 설교가 주된 내용입니다. 특히 5장부터 7장까지 아우르는 산상 설교가 유명합니다. 이 설교는 진복팔단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초반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설득하고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흥미를 느끼지만 그들의 율법에 대한 완고한 마음은 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이나 바리사이 모두 동감을 합니다. 따라서 후반에 접어들면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를 꾸짖는 데 주저하지 않고 바리사이들은 대놓고 예수님을 시험하며 끝내 그들이 반목하고 미워하는 사두가이와 손잡고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마태오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탄생은 루카의 그것과 사뭇 다릅니다. 다시 말하자면 루카 복음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탄생 비화를 들려주지만, 마태오는 성모님의 남편인 요셉을 중심으로 서술됩니다. 이는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의 문화적 종교적 배경의 차이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큘라스의 이야기처럼 성모님을 통하여 성령으로 하느님의 외아드님을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그리스인들은 받아들이기 쉬었습니다. 반면 유대인에는 메시아로서의 정체를 이해하는데는 혈통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유대의 전통적인 예언에 메시아 즉 구세주는 다윗 왕의 자손에서 나온다고 하였고, 부계 혈통 중심 사회인 유대인들에게 성모님보다는 요셉의 혈통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그렇기에 마태오 복음의 시작에 요셉 성인의 족보를 통하여 그의 아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먼저 드러낸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는 부르는 데서 잘 알 수 있는데, 이 호칭이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주요 독자가 유태인이라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하느님의 나라’를 ‘하늘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입에 거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라고 써 있어도 ‘주님’이라고 읽습니다. 요즘도 유태인계통의 종교 팸플릿에는 God 라고 쓰지 않고 G-d 하고 쓴 문장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의 공통된 주제는 세상 끝 날이 오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우리를 영원한 삶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세계 멸망이나 종말의 시간은 파괴와 죽음의 때가 아니라 구원의 때라는 것입니다. 즉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간절히 예수님께서 오시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듣는 마태오 복음의 행간에서 바로 그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의 24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시어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시작합니다. 지지난 주일(연중 제33주일) 루카 복음에서 들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성전 파괴와 함께 세상 재난과 전쟁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오신다는 멸망과 구원을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가 바로 재난과 전쟁으로 세상이 파괴되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때가 나뭇가지에 잎이 돋아나면 곧 여름이 오는 줄 아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참조 마태오 4: 32-35)

 그리고 오늘 모든 믿는 이들에게 깨어있으라고 경고하십니다. 분명히 사람의 아들은 세상 종말의 시간에 다시 오시지만 그 때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24: 36) 이를 노아의 홍수 때에 비유해서 설명하십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를 깨어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막연히 기다린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망부석’의 이야기에서 기다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중 제일 유명한 설화는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왕의 명을 받고 왜국에 볼모로 잡혀간 왕의 동생을 구하러 갔다가 그 동생은 구했으나 왜의 신하가 되기를 거절한 박재상은 왜국에서 죽었는데, 이를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기다리던 부인이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돌이 될 정도로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것이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 기다림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알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기다림은 오히려 돌이 될 정도로 삶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다림’은 이렇게 하염없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준비하는 기다림입니다. 그리고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꼭 실현될 미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기다림은 깨어 준비하는 기다림입니다. 임 떠나간 바다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리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은 바로 우리의 기다림이 헛된 기다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축제입니다. 구약의 오랜 세월을 기다려온 하느님의 외 아드님인 메시아께서 이천 년 전 성령으로 인하여 나자렛의 어린 처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습니다. 이 사실이 구원의 예언을 확실한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위하여 수난을 받고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신 메시아 예수님께서 영원한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다시 오실 날을 확신을 갖고 기뻐하며 이를 준비하는 시간이 바로 대림절입니다.

 우리의 준비는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믿어서 이를 우리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한 이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회개하는 이를 용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듯이 우리 이웃을 불쌍히 여기어 자비와 관용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몸과 마음을 움추리게 하는 겨울이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겨울을 준비하듯 우리는 구세주께서 다시 오실 날을 준비합니다. 함께 더불어 기쁨과 희망과 사랑으로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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