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2년 9월 4일

오늘은 연중 제23주일로 9월의 첫 주일로 노동절 (Labor Day) 주말입니다. 이제 여름은 가고 가을이 성큼 우리 곁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납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은 따갑지만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쾌적합니다. 바람에 찰랑거리는 나뭇잎이 가벼워 보입니다. 단풍을 서서히 준비하는 듯합니다. 이번 주말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바베큐를 즐기며 우리의 의식주를 위한 노동의 숭고한 가치를 되새기고 우리 서로가 위로하고 힘을 주며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시간입니다.

  삶의 노동은 삶의 형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숭고한 일입니다. 노동은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행복을 위한 노력이기에 어느 누구도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이 숭고한 노력을 착취해서도 안 됩니다. 누구나 자신의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구월의 시작은 자연이 가장 왕성하게 자라는 여름의 끝을 말합니다. 구월의 시작은 여름에 자라는 열매가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월의 시작은 여름 내내 들뜬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주님의 마음을 닮아갈 때입니다.

  우리 본당도 차분한 마음으로 구월을 준비합니다. 다가오는 주일학교와 한국학교 개학에 교사들이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마 아이들도 긴 여름방학을 마치며 개학 준비에 마음이 무거울 것 같습니다.

  방학이 끝날 때처럼 긴장되고 허무할 때가 없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여름 내내 누렸던 자유(?)의 끝을 알립니다. 그래도 동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니 위로를 받습니다. 주일학교와 한국학교에서 아이들이 다시 만나 배우고 놀고 기도하며 자라납니다.

  지난 주일에는 하상회가 주관하여 요셉회 어르신들을 위한 효도 관광을 다녀왔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멀리 갈 수 없었지만 그래도 뉴저지 뉴튼 수도원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안전하게 돌아왔습니다. 요셉회 어르신들의 건강과 하상회 회원들의 노고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도드립니다.

  또 지난 목요일 9월을 시작하는 날 저녁에 우리 본당의 새로운 여성단체인 ‘효주회’ 창단 감사미사가 있었습니다. 이는 김효주 아네스 동정 순교 성인을 주보로 한 단체로 대상은 주일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어머니들로 로사리오회에 입단되기 전 연령대의 어머니들로 구성됩니다. 어머니회와 로사리오회의 중간 단체가 됩니다. 이로써 어머니회, 효주회, 로사리오회, 안나회로 잇는 여성단체가 완성되었습니다.

  물론 예전에는 효주회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평균연령이 빠르게 늘어나는 세대에 살아가는 관계로 세개 단체로는 모든 연령대 어머니들의 필요를 충족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남성 4개 단체와 여성 4개단체가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그동안 어느 단체도 들지 못했던 분들이 자신의 연령과 상황에 맞추어 단체에 가입하여 좀 더 활발한 신앙생활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위의 8개 단체는 비슷한 연령대의 신자들이 모여 봉사와 기도를 통해 신앙심을 배양하고 보다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하기위한 단체입니다.

  9월을 시작하며 듣는 예수님의 복음 말씀은 루카 복음의 14장의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에 14장의 시작 부분을 들었는데, 예수님은 잔칫집에 가거든 끝자리에 앉으라 하시며 겸손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4:11) 하고 말씀해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세상적인 풍속도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겸손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기득권의 사람들이나 권력이 있는 자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잔치에 가면 당연히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합니다. 높은 자리를 주지 않으면 화를 내고 해코지를 하려합니다.

  이렇게 혼인 잔칫집 비유로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후에 바로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혼인 잔치에 오지 않은 이들에게 화를 내시고 거리에 나가 아무나 초대하여 잔치를 크게 벌립니다. 이는 마태오 복음의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와 같은 내용으로 기왕의 선택된 사람들이 초대에 응하지 않자 이방인들을 초대한다는 내용으로 결국 구원의 주체는 기존의 선택된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이 말씀 후에 오늘의 복음이 ‘버림과 따름’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세상적 욕망과 탐욕과 시기 질투뿐만 아니라 식구마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14:26-27)

  이 말씀만으로도 굉장히 급진적이고 어떤 면에서 황당한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천륜도 저버리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혹자가 이를 들으면 아마도 우리 신앙에 대해 적대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말씀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적대감을 더하여 미워하고 나아가 죽이려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서 부모 형제를 버리고 자신의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은 천륜적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관계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데 지장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려워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즉 부모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따라 구원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부모 형제의 강요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먼저 믿고 따르면 가족도 구할 수 있지만, 가족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하면 가족뿐만 아니라 자신을 구하는 것도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은 굉장히 역설적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시고 자신 목숨을 미워해야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역설의 신비는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세상적 상식을 깨고 예수님의 지혜로 채워 세상을 바라보고 구원을 향해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 것을 먼저 챙기기 전에 옆의 이웃을 챙겨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고통을 호소하기 전에 더 아픈 이를 위로해주고, 나의 공을 내세우기 전에 남의 공을 먼저 칭찬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면 손해 보는 바보 같지만 결국 모든 것을 보시는 하느님께서 더 많은 상을 내려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지금 지상에서 호의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로 함께 걸어가는 순례자인 것입니다. 이 길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 비좁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너무 비좁고 어렵지만 함께 라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어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의 요점을 하나로 집약이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내가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 희생적 사랑이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생명을 얻게 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버림과 떠남은 사랑의 희생적 실천인 것입니다.

  가을이 우리 앞에서 서성입니다. 오늘 Labor Day 이웃들과 바베큐를 즐기며 여름을 보내고, 다가오는 가을과 함께 차분히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바쁜 세속적 삶 속에서 망중한의 시간을 갖고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고 음미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지치고 힘든 일상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처럼 청명한 마음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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