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2년 8월 7일

팔월의 첫 번째 주일인 연중 제19주일을 맞았습니다. 지속되는 폭염에 “여름은 원래 그래!”하는 말도 쏙 들어갔습니다. 그만큼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뉴욕은 다른 곳보다 나은 듯합니다. 폭염과 이상 기후로 산불과 홍수가 여러 곳이 피해를 입고, 이상 기온으로 불편함을 넘어 위험한 수준으로 삶을 위협하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요즘 뉴스를 들어보면 답답할 뿐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국제적 분쟁이 끊이지 않고, 급기야 분쟁이 전쟁으로 발화된 곳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과 대만의 분쟁이 세계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상 기온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나아가 경제적 불안감은 우리 일상을 어렵게 만듭니다. 참 힘든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은 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 땐 쉬어 가면서 서로 위로하고 도와주며 함께 넘어야 합니다. 이 산꼭대기에 오르면 그때 보여지는 아름다운 세상이 또 우리의 가슴을 시원할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쉽지 않은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행복하길 바라며 오늘 땀을 흘리기에 내일에 대한 희망이 생기고, 그 희망으로 오늘을 견뎌냅니다. 그런데 견디는 것만으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지쳐 쓰러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내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이를 위해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내는 희망을 기반으로 합니다. 희망은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믿음과 희망은 쌍둥이처럼 언제나 함께 갑니다. 나아가 믿음은 용기의, 희망은 인내의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12장의 말씀으로 세가지 주제의 말씀을 듣습니다. 시작은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33-34)는 예수님의 충고입니다. 이를 위해 ‘깨어 있으라’(42-44)고 경고하십니다. 깨어 부지런히 주인의 말씀대로 행하는 종이 충실한 종(45-51)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12: 32)

  이 말씀에서도 두려움이 없는 용기를 갖기 위해 두 가지 중요한 믿음과 희망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아버지’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어느 신앙이든 당연히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믿고 바라는 마음이 신앙입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하느님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제2 독서인 히브리서는 믿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히브리서 11: 1)

  사실 유대교나 이슬람교도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유대교의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에 반해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삭의 이복형 이시마엘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교의 하느님을 믿지만, 나아가 예수님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유대교의 하느님이 율법의 하느님이라면, 예수님의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즉 율법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믿음입니다.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라는 천륜의 관계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시듯이 당신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입니다. 그렇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용기의 이유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 희망의 이유라고도 일컫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의 궁극적 목표는 아버지의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여정의 시작은 지금입니다. 그리고 이 여정은 단순히 고난의 여정은 아닙니다. 수난과 고난을 겪어내면서 얻어내는 매 순간의 기쁨과 행복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구원의 여정은 끝없는 인내의 연속이 아니라 기쁨의 날실과 고난의 씨실이 교차하며 짜는 아름다운 천과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이야기입니다.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주인이 없다고 주인이 올 때까지 흥청망청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고통을 극복하며 기쁨을 누리다 보면 주인이 돌아오고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나라에 영원히 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렇게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에서 지금 시작됩니다.

  우리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깨어 있는 종처럼 생활하고(12: 37), 목자들은 그들에게 슬기로운 집사가 되면(12: 42) 우리 모두가 행복하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슬기로운 집사처럼 되길 바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12: 42-44)

  슬기로운 집사와 어리석은 집사,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과 그렇지 못한 종과의 사이는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믿음과 희망의 열매는 참으로 크고 달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현재의 세상은 참으로 어지럽습니다. 그렇기에 내일은 더욱 불확실합니다. 불안과 불확실함은 우리의 삶은 참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굳은 믿음이며 희망입니다.

  우리의 굳은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함께 더불어 인내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고난입니다. 훗날 이 고난의 꼭대기에서 기쁨의 함성을 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마주 잡는 손길에서 위로와 용기를 확인하고, 빙그레 웃는 미소에서 훈훈한 마음을 느낍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고난 위에서 행복을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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