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1년 7월 19일

오늘은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7월 19일 흐린 날씨로 국지적으로 비가 내리는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직도 습도가 높지만 지난 주보다는 훨씬 지내기가 쉬운 날씨입니다. 이렇게 날씨 하나로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나약함에 겸손을 배워봅니다.

어제는 본당 단체 대항 족구와 피구 대회를 했습니다. 원래 족구 대회만 매년 여름에 했었는데, 자매님들의 참여가 거의 불가능해 올해는 사목회의 건의로 피구를 더했습니다. 이러다 본당 올림픽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우도 해봅니다.

지난 일년 반 동안 코비드로 잔뜩 움츠려 지내다가 오랜만에 본당 파킹장에서 열악하나마 활발하고 신나는 시간을 갖으니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입니다. 역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두려워 하기 보다는 믿음으로 조심하면서 일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안전하고 행복하게 사는 길 같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역시 마태오 복음의 12장 (38-42절)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초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에수님의 기적도 보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기적의 은총을 직접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몇몇은 이렇게 요구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12: 38)

그들이 요구하는 “표징 (Sign)”은 불신을 지워버릴만한 증거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는 기적을 보고도 악마의 대장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십계명을 받는 것 같은 기적을 보여줘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악마 대장이라고 말할 것이 뻔합니다.

불신을 하면 모든 행동과 말 하나하나가 의심스럽습니다. 미워하면 모든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미워서 화가 납니다. 웃는 모습도 보기 싫어합니다. 좋은 일을 해도 가식이라고 치부해버립니다.

믿으면 도 바보가 되어버립니다. 황당한 주문에도 속아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러한 믿음에는 주로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그렇게 안하면 일이 잘못될 것같은 두려움이 이상한 믿음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한 믿음은 또 건강하지 못한 결과를 냅니다. 이상한 행동을 한다든지 누군가를 미워한다든지 또 문제를 누군가에게 전가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믿을까? 누구를 믿을까? 하는 문제는 참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참 잘한 것은 바로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믿은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하느님을 떠나기도 하고 불신하기도 하며 많은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 하느님께 돌아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을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부적’이 아니라 표징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우리를 더불어 함께 살아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나만 잘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 살자는 것입니다. 나의 안위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표징을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것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세상의 지혜와 슬기와 다르더라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세상적으로 바보 같아도 결국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삶의 짐이고 멍에 같이 느껴도, 그분의 짐은 가볍고 그 분의 멍에는 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를 들으신 예언자 요나의 일에서 니네베 사람들과 같은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언자 요나가 이방인들에게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기에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나가 이방인들의 구원이 싫어 어쩔 수 없이 대충 전했음에도 니네베 사람들은 듣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회개”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회개는 단 하나입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당장의 이익이나 쾌락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과 당장의 파괴적 쾌락이 아니라 모두의 따듯한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모습과 형상으로 창조 되었다는 가장 중요한 표징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되새겨 봅니다. 네 하느님을 온 몸과 온 맘과 온 정신과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느님은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느님이 정말 못마땅합니다. 이에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뭐든지 좋아하고, 없으면 안타까워 하면서 그렇지 않은 것이나 사람에게 그렇게 냉정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아끼고 동정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힘있고 똑똑하고 능력 있고 슬기로운 자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힘없고 능력이 부족하고 바보같아도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쓰러지고 지치고 실패한 이들을 위해서도 하느님은 기다려 주시고 힘을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죄인들에게도 용서해 주실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믿을까? 누구를 믿을까? 고민 해봅니다. 그리고 결론은 하나입니다. 바로 삼위일체의 하느님,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 구원자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를 성화시켜 주시는 성령님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탈출 15,1ㄷㄹㅁ-2.3-4.5-6(◎ 1ㄷㄹ)
◎ 주님을 찬양하세, 그지없이 높으신 분.
○ 주님을 찬양하세.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하셨네. 주님은 나의 하느님, 나 그분을 찬미하리라. 내 조상의 하느님, 나 그분을 높이 기리리라. ◎
○ 주님은 전쟁의 용사, 그 이름 주님이시다. 파라오의 군대와 병거를 바다에 내던지시니, 뛰어난 장수들이 갈대 바다에 빠졌네. ◎
○ 바닷물이 그들을 덮치니, 돌처럼 깊이 가라앉았네. 주님, 당신 오른손이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시니, 주님, 당신 오른손이 원수를 짓부수셨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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